KCCBR, December 5, 2010
베드로전후서 (4) 벧전[1 Peter] 1:8-9
“예수를 사랑하세요?”[Do You Love Jesus?]
1.
오늘은 금년도 마지막 52번째 주일입니다.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하루하루를 사는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지난번에 짐 집사님이 독서 발표회를 하실 때, 우리는 은혜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는 가치가 없는(worthless) 것인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값 싼(cheap)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혹은 공짜로(free) 주어지는 것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받는 쪽에서는 하나도 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주는 쪽에서는 모든 것을 한 것입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부모가 자녀를 낳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 쪽에서 모든 것을 합니다. 한 생명을 낳기 위해 생명을 잃을 각오까지 합니다. 그러나 자녀의 입장에서는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의 탄생은 수동태(受動態 passive voice)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릴 때부터 들어온 말이 “낳으시고 기르시는 부모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은혜를 베푸는 분은 일방적인 사랑으로 은혜를 베풉니다. 은혜의 정의가 곧 일방적인 호의입니다. 은혜를 받는 대상은 은혜를 받는 순간, 일생 동안 은혜의 빚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할 때, 그 은혜에는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가치한 것도 아니고, 값싼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호의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마음이 태도가 그의 안에 있어서, 그 태도로 일생을 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빚쟁이로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로 산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베드로전서의 말씀도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베드로전서 1:8 말씀을 봅시다.
2.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8 Though you have not seen him, you love him;
and even though you do not see him now, you believe in him
and are filled with an inexpressible and glorious joy,
사도 베드로는 지금의 터키 지역의 북부와 서부에 속하는 지역의 성도들에게 이 서신을 쓰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시리아 지역과 함께 초대교회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밀집해 있던 곳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지역의 성도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세 가지 특징을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1) “비록 여러분이 예수님을 본 적은 없지만, 그분을 사랑하는군요.”(Though you have not seen him, you love him):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난 제자들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난 제자는 요한과 안드레입니다. 그리고 안드레가 바로 자기의 형인 시몬을 예수님께 소개했는데, 그 시몬이 곧 베드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이 예수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음을 강조합니다. 베드로후서 1:16 말씀을 보면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6 We did not follow cleverly invented stories
when we told you about the power and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but we were eyewitnesses of his majesty.
사도 베드로가 이런 말씀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부의 사람들이 사도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오심과 능력과 위엄을 친히 보았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인이 곧 예수님을 보고 체험한 증인(we were eyewitnesses of his majesty)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도 동일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1:1-2 말씀을 봅시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1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
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사도 요한은 그가 전하는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이 바로 태초부터 계셨다고 증언합니다. 요한을 포함한 사도들은 예수님께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았고, 자세히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심지어 손으로 만졌습니다. 그 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고, 주목하고, 만질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요한일서 1:2 말씀을 봅시다.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2 The life appeared;
we have seen it and testify to it,
and we proclaim to you the eternal life,
which was with the Father and has appeared to us.
태초의 말씀, 생명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신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분을 보았고, 증언하여 여러분에게 전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분이 성부 하나님과 함께하셨던 성자이십니다.
이제 사도 베드로가 그의 서신을 받는 성도들에게 격려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은 예수님을 보았고 함께 교제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을 본 적이 없는데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보았습니까? 예수님을 보았다면 그가 바로 사도가 기본적인 자격을 갖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뵌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오늘 아침에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세요?”(Do you love Jesus?)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그 증거를 드러내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살아갈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시련과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낼 믿음이 있습니다. 죄의 유혹과 싸워 이겨낼 영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고달프다면, 왜 그럴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지난 한 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앞에 놓인 새로운 한 해도 역시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베드로전서를 받는 성도들의 가지고 있던 믿음의 두 번째 특징은 무엇일까요?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2) “그리고 비록 여러분이 지금도 예수님을 볼 수 없지만, 예수님을 믿고 있군요”(and even though you do not see him now, you believe in him): 그렇습니다. 베드로전서를 받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볼 수 있어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볼 수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요한복음 15:26 말씀을 봅시다.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6 "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보혜사 성령님은 성자께서 성부로부터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성령님이십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곧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볼 수 없어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고린도전서 2:12 말씀을 봅시다.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2 We have not received the spirit of the world
but the Spirit who is from God,
that we may understand what God has freely given us.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오시는 영이신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어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고린도전서 12:3 말씀을 볼까요?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3 Therefore I tell you
that no one who is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says,
"Jesus be cursed,"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그러므로 예수님을 진실하게 주님으로 고백한 모든 사람들은 성령님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성령께서 가지고 오신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4.
사도 베드로가 그의 서신을 받는 성도들을 격려하는 것은 단지 이것만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를 받는 성도들의 믿음의 특징 중에 세 번째는 어떤 것입니까?
(3) “여러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군요”(and are filled with an inexpressible and glorious joy):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은 기쁨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기쁨 혹은 즐거움으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카라”(chara, χαρά)라는 단어입니다. “카라”는 “희락”이라는 말로도 번역됩니다. 그러므로 카라는 아홉 가지 맛을 내는 성령의 열매의 두 번째 맛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즐거움, 이 기쁨, 이 환희, 이 희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전서를 수신하는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를 사도 베드로는 이 “카라”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1 말씀을 봅시다.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1 I have told you this so that my joy may be in you
and that your joy may be complete.
우리 안에 주님의 기쁨이 있는 것은 곧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다릅니다. 세상의 기쁨은 상대적입니다. 조건적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기쁨의 조건이 없어지면 그 기쁨마저도 사라지는 그런 조건적이고 일시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이 기쁨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기쁨은 지금 베드로전서를 받는 성도들의 안에 있는 그런 기쁨입니다.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 있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우리 안에서 넘쳐나는 기쁨의 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종류의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그러한 기쁨이 있습니까? 기쁨은 마치 삶의 윤활유와 같습니다. 자동차의 원리를 잘 모르는 분들은 자동차에 가솔린만 넣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엔진 오일을 교환하지 않고 몇 만 마일을 탑니다. 결국 엔진의 윤활유인 오일이 다 타버리고 말라붙고 나면, 급기야는 엔진까지 타서 실린더와 피스톤을 망가뜨리게 되고, 결국은 엔진 자체가 고장이 나서, 자동차 자체를 쓰지 못하게 됩니다. 마치 우리 몸으로 말하면 심장이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 자동차의 엔진이 아무리 좋아도 윤활유인 엔진 오일이 없으면,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듯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우리의 삶이라는 엔진에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리 힘든 일도, 아무리 어려운 일도, 아무리 아픈 것도 이겨낼 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것도 이겨낼 힘이 있는가하면, 또 다른 사람은 작은 것에도 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이 기쁨을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얼굴에 늘 주님의 기쁨이 넘쳐흐르면 정말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의 영혼의 깊은 곳에 이 기쁨의 샘이 말라붙지 않도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은 마치 엔진에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그렇게 힘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를 수신하는 성도들의 신앙의 세 가지 특징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을 본 적도 없지만,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2) 예수님을 지금도 볼 수 없지만, 예수님을 믿습니다.
(3)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을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그들의 신앙의 이러한 특징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5.
베드로전서를 받는 성도들의 믿음의 특징의 근본적인 원인은 9절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계속해서 베드로전서 1:9 말씀을 봅시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9 for you are receiving the goal of your faith,
the salvation of your souls.
베드로전서를 받는 성도들의 믿음의 목표(the goal of your faith)는 그들의 영혼의 구원(the salvation of your souls)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구원을 현재진행형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받은 구원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여 주십니다. 베드로전서 1:18-19 말씀을 봅시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8 For you know
that it was not with perishable things such as silver or gold
that you were redeemed
from the empty way of life
handed down to you from your forefathers,
아담으로부터 우리의 부모까지 우리의 조상으로부터 우리에게 물려준 원죄와 헛된 행실에서 우리가 대속함을 받은 것은 금이나 은과 같은 돈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죄의 값을 치르고, 구원을 얻게 되었을까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19 but with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a lamb without blemish or defect.
그렇습니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이나 우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우리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은이나 금이나 돈을 믿는 믿음도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어린양,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받은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곧 주님의 대속적 죽으심, 우리의 죄를 위하여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우리 주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결과, 이 믿음의 목표가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 구원이 있는 사람들은 주님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계속적으로 믿습니다. 주님의 주시는 기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이 믿음이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베드로전서 1:23 말씀을 한 번 더 봅시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3 For you have been born again, not of perishable seed,
but of imperishable, through the living and enduring word of God.
그렇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곧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씨로 인하여 된 것입니다. 그 씨는 썩어질 이 세상의 씨가 아니라,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가 우리의 영혼에 심겨진 결과인 것입니다.
6.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주님을 사랑하는 기쁨, 주님을 믿는 믿음, 주님의 주시는 기쁨이 없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의 보혈로 대속함을 받았는지,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살아 계시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났는지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여기가 근본입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이곳이 곧 출발점입니다. 여기서부터 안 되면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앞에 당한 인생의 경주를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달려갑시다. 우리 앞에 또 놓여 있는 새로운 한 해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전진합시다. 우리 앞에 주어진 새로운 기회를 기쁨이라는 주님의 주시는 윤활유로 인하여 힘차가 굴러갑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바른 믿음인지, 우리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았는지, 하나님의 살아 계시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났는지를 돌아보는 이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금년의 마지막 날 금주 금요일 2010년 12월 31일과 내년 첫날 2011년 1월 1일 토요일인 가까운 수련회장으로 옮겨서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으며, 골로새서를 함께 나누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각 개인들과 성도들과 교회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받는 그러한 송구영신수련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