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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과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삼상 2:12-26)

한나는 그 아들 사무엘을 여호와께 드렸지만,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은 여호와를 알지 아니한 불량자들이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으며,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죄들을 저질렀다. 엘리는 그 아들들에 대하여 훈계를 하였지만,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사무엘은 점점 자랐으며, 하나님은 엘가나와 한나 사이에 3남2녀의 자녀를 더 허락하셨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하여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자.

1.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누구를 알지 아니하였는가 (12/참조, 삿 19:22; 삼상 1:16)?
12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니라
(답)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니라”
(해설) 11절을 보자.
11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어린 아이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지만, 엘리의 친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자들이었다.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였다. 히브리 원어로 볼 때, 12절 상반절은 “엘리의 아들들은 벨리알의 아들들이었다.” 벨리알은 우리가 사사기를 공부할 때 기브아의 폭도들인 기브아의 “비류들”에게 사용되었던 단어와 동일한 단어이다 (삿 19:22; 20:13).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레위인과 그의 첩, 그리고 하인은 늦은 밤에 되어서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려고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초청하여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때 마침 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에브라임 지파 출신 한 노인이 자기 집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함께 먹고 마시는 시간을 갖고 있었다 (삿 19:1-21). 이제 그들이 모든 것을 먹고 마신 후 “마음을 즐겁게” (While they were enjoying themselves) 할 때,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문이 부서져라 두들기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사사기 기자는 그 집을 에워 싸고 문을 두들긴 사람들을 “기브아의 비류들”이라고 소개한다. 여기 “비류”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벨리알”(Belial)이다. 이 단어는 아마도 부정 접두사 “벨리” 즉 “아무 것도 아님” (nothingness, not, without)과 명사 “알” 즉, “가치,” “이득,” “혜택” 등 (worth, profit, benefit)이 결합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벨리알은 “쓸모 없는 것들의 아들들, 아무 가치 없는 인간들” (sons of worthlessness, men without worth/horner)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같은 표현이 구약에는 16회나 나온다 (신 13;13; 삼상 1:16; 삼상 25:25; 왕상 21;13; 잠 16:27 등). 구약에서 이 단어 해당되는 사람들은 살인자들, 강간범들, 거짓 증인들, 타락한 제사장들, 알코올 중독자들, 반역자들, 다른 사람들을 우상숭배로 이끄는 자들, 여호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고후 6:15에 한 번 나오는데, 사탄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엘리의 아들들을 “벨리알의 아들들”이라고 했을 때, 그 뜻은 “아무 쓸모 없는 사람들”(Worthless men) 혹은 “좋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good-for-nothing; 쓸모 없는 사람, 밥벌레, 건달 등)을 의미한다. 엘리 제사장이 기도하던 한나를 보았을 때, 그는 그녀가 알코올에 중독된 여인으로 보았다. 그래서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한나는 자신이 마음이 슬픈 여자이며, 여호와 앞에 그녀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라고 말하며,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한나가 말한 “악한 여자”가 곧 “벨리알의 딸”이라는 단어이다. 정말 꼭 집어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엘리는 자기의 아들들이 “벨리알의 아들들”이었는데, 한나를 “벨리알의 딸”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벨리알의 아들”을 한글 성경에서는 불량자로 번역하고 있다. 참 재미있고, 적절한 번역이다. 꼭 불량품이 생각난다. 불합격품이 생각난다. 이전에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이들은 스포일(spoil)된 사람들로 설명하셨다. 즉 부패하였다는 것이다. 제사장으로서 불량품이라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이스라엘의 자녀로서 불량품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불량자를 정의할 때,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니라” (로 야데우 에트 예흐와)라고 하였다. 즉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동사 “알다”는 히브리어로 그 유명한 “야다”라는 단어이다. “야다”는 단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적이 앎이다.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머리와 지식으로는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알았을까? 그러나 그들은 가치관과 철학과 사고와 생각과 삶과 태도로 여호와를 알지 않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했으며, 여호와의 말씀과 그분께 드리는 제사와 그분의 백성들을 우롱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안다는 말은 여호와를 경외한다 (respect or honor)는 말과 같으며, 또한 여호와께 순종한다 (obey)는 말고 같은 것이다. 사실 이것이 다이다. 그러나 엘리의 아들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엘리의 아들들이 어떻게 벨리알의 아들들이었으며, 또 어떻게 여호와를 경외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았는지 사무엘상 저자가 제시하여 주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2. 엘리의 두 아들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어떻게 하는 것이었는가 (13-14/참조, 레 3:1-5, 16-17; 7:28-34)?
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답)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해설) 홉니와 비느하스는 백성들에게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생각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인생을 낳고, 인생이 운명을 낳는다”는 식의 말도 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미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제사를 드리는 백성들은 우롱하는 것이 한 두 번의 범법이 아니었다. 이미 습관이 되었던 것이다. 분명히 제사장들도 자기 순번이 있어서 그 순번을 따라가며 그 역할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엘리의 집안은 수 십 년 간 계속적으로 제사장으로서 실로에서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홉니와 비느하스가 어렸을 때부터 그들은 여호와께 사람들이 와서 예물을 드리는 것을 보고, 그 예물의 일부 제사장의 몫으로 엘리가 받으면 그것을 먹고 자라났을 것이다. 굳이 책임을 묻자면, 엘리 제사장은 어떻게 자녀들을 길렀기에 아들들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했다는 말인가? 엘리 제사장은 자녀들을 말씀으로 키우지 않고 단지 제의로서 키웠는가? 아니면 사람이 워낙 물러서 자녀들에게 심한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그냥 곱게 곱게만 키웠는가? 엘리를 보면 정말로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길러야 할까 커다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엘리는 사실 훌륭한 제사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이가 먹으면서 예민함이 떨어지기는 했을지라도, 평생을 하나님을 섬긴 훌륭한 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는 그 아들들을 바로 키우지 못한 죄로 영원토록 불명예스러운 말을 듣게 된 것이다.
        번제의 경우는 제물의 태워서 드릴 수 있는 부분은 다 태워서 드리기 때문에 제사장이나 제사를 드린 예배자나 제물에서 먹을 수 있는 부분이 없다. 그러나 다른 제사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소를 한 마리 드린다고 할 때, 하나님께 드리는 부분, 제사장에게 드리는 부분, 그리고 예배자가 그 가족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부분이 다 율법에 정해져 있다. 예를 들어 화목제를 생각해 보자. 레위기에는 여러 가지 제사에 대한 규정이 나와 있다. 3장에 보자. 1절부터 보면 흠없는 수소나 암소를, 먼저 예배자가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그 예물을 잡는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피를 제단의 사면에 뿌린다. 피를 절대로 먹지 말라는 것을 우리가 알거니와 피에 대한 규정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다. 피는 여호와의 것이고, 피는 어떠한 형태로든 먹거나 마시거나 요리를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음에 기름이다. 기름은 여호와께 태워서 드리는 화제의 형태로 드린다. 내장에 덮인 기름,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두 콩팥,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 간에 덮인 기름 등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 살라야 하는 것이다. 그 예물이 양이나, 염소여도 기본적인 것은 비슷하다. 16-1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몫은 결국 피와 기름이다. “제사장은 그것을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식물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의 모든 처소에서 영원한 규례니라” (레 3:16-17).
        그러면 제사장은 어느 부분을 먹게 되어 있은가? 즉 예배자는 제사장의 몫으로 어디를 드리는가? 레위기 7장을 보자. 28절부터 34절까지 보면 결국 예물의 가슴과 우편 뒷다리를 제사장에 드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제사장은 예배자가 화목제의 기름과 가슴과 우편 뒷다리를 가지고 오면 기름은 태워서 여호와께 드리고, 가슴과 우편 뒷다리는 여호와께 흔들어서 거제로 드리고 자기들의 양식과 소득으로 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화목제의 기름을 태워 드린 그 제사장이 그 소의 가슴과 우편 뒷다리를 자기의 소득으로 받는 것이다. 34절을 보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취하여 제사장 아론과 그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 (레 7:34). [참고, 신명기 18:3은 “제사장이 백성에게서 받을 응식은 이러하니 곧 그 드리는 제물의 우양을 물론하고 그 앞 넓적다리와 두 볼과 위라 이것을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엘리의 두 아들들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행한 죄악은 너무나 큰 것이다. 이미 예배자들은 피를 제단에 흘리고, 기름을 태우고, 가슴과 우편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기들이 먹을 것을 솥이나 큰솥이나 가마에 삶고 있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제사장들은 사환들을 보내어 그 고기들을 세 살 갈고리로 찍어서 걸리는 대로 강탈해 가는 것이다. 그야말로 제사장의 계급을 이용한 횡포를 부리는 것이다. 종교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3. 또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15)?
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답)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해설) 그러면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기름을 태우는 것은 번제단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과정을 생각해보자. 예배자가 예물을 끌고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순하고 회막 문에서 잡는다. 잡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죽인다는 것을 포함해서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오물을 버리고, 피를 받고, 기름은 기름대로 걷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홉니와 비느하스가 사환들을 시켜서 고기를 강제로 빼앗을 때, 언제 빼앗았다는 말인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지단다. 첫째, 피를 드리는 것이다. 피는 제단 주변에 뿌린다. 둘째, 기름을 태워 드리는 것이다. 제사장에게 기름을 드리면 제단에서 태워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를 올려 드린다. 셋째, 기름과 함께 제사장의 몫을 드리면 제사장은 자기의 몫을 하나님께 거제로 올려 드리고 자기의 식물로 취하여 먹는다. 그러면 본문에 의하면 짐승을 잡자마자, 기름도 태워 올리기 전에 자기의 몫을, 혹은 자기의 몫보다도 더한 것을 요구했다는 의미이다. 사환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제사장에게 구워 드일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않으시고 날 것을 원하신다”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

4. 제사 드리는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고 하면, 제사장의 사환이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16)?
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답) “아니라 지금 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해설) 이제 16절에 의하면 예배자는 율법을 알기에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제사장에게 드리겠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나님께 먼저 기름을 태워 드린 후에 제사장에게 드리는 몫을 드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환은 “아니라 지금 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고 말한다. 완전히 횡포가 아닌가?

5.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큰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17/참조, 딤전 6:3-5)?
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답)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해설) 이 사실에 대하여 사무엘상 저자의 평가는 무엇인가? 먼저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가 여호와 앞에 크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가 큰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먼저 기름을 태워 드려야 하는데,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예배자들에게 무엇을 빼앗아 먹을 것인가에 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불교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예배자들에게로부터 무엇을 빼앗아 먹을 것인가에 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목회자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성도를 섬김에 있어서 나도 이렇게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멸시하고, 성도를 우롱하고, 그들에게로부터 무슨 이득을 얻을 것인가에 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다. 먼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할 예배와 존경과 경의와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많던 적던 간에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그러나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러한 면에서 주객이 완전히 전도된 것이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치부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경건의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이다 (딤전 6:3-5):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는데, 그 어미가 매년제를 드리러 그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그 아들 사무엘을 위하여 어떻게 하였는가 (18-19/참조, 삼상 1:28하; 2:11하)?
18@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19        그 어미가 매년제를 드리러 그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답)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해설) 사무엘상 저자는 곳곳에 적당한 곳에 사무엘에 관한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고 말한다.
지나간 구절까지 소급해서 보면
1) 1:28하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2) 2:11하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3) 2:18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세 구절 다 사무엘이 여호와를 경배하고 여호와를 섬겼다고 나와 있다. 이제 2:18절은 사무엘이 세마포(linen) 에봇을 입었다고 되어 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옷을 의미한다. 제사장은 25세 이상이 되어야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를 할 수 있는데, 레위인의 자녀로서 평생을 여호와께 드림이 된 사무엘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을 입었다는 의미이다. 이미 제사장 엘리를 도와서 제사장의 임무를 배우기도 하고 수행을 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일까?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이고, 사무엘상 저자는 어린 사무엘이 그러한 에봇을 입은 것뿐만 아니라 어머니 한나가 매년 매년제를 드리러 올라올 때마다 어린 사무엘의 키와 몸의 성장에 맞추어서 그에 맞는 겉옷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즉, 한나는 자기 아이가 한 해 동안 이만큼 자랐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겉옷을 지어서 그것을 가지고 올라오는 것이다. 어린 아들을 하나님의 전에 바치고, 그 애틋한 마음을 이렇게 옷을 지어서 가지고 와서 입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나는 얼마나 자기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을까? 이제 사무엘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젖을 뗀 것이 약 3년 쯤 되어서라면, 약 2년이 지났으면, 최소한 만 5세가 되었을 것이다. 엘가나와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의 전에 드린 후에도 아직도 아기가 없었던 것이다.

7. 엘리가 엘가나와 그 아내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20)?
20        엘리가 엘가나와 그 아내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그 집으로 돌아가매
(답)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해설) 엘가나와 한나는 그들 사이에 다시 아기가 생기지 아니하여도 그 일로 다시 서원기도를 한다든지, 그 일로 제사장 엘리와 대화를 나눈다든지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대신에 그는 기왕에 주신 사무엘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가 하나님의 전에서 잘 자라는 데에 기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사장 엘리는 보는 눈이 있었다. 비록 엘가나와 한나가 아이를 더 낳을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의 제목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간절히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한문 성어로 말하면 “불감청이나 고소원”(不敢請 固所願: 감히 청할 수는 없으나, 간절히 바라던 바이다)이라고 한다. 엘리의 영적 예민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래서 엘리는 엘가나와 한나 부부에게 먼저 자원하여 축복의 말을 하여준다: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엄밀하게 말하면 엘가나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이 여인 한나로 말미암아 엘가나 당신에게 후사를 주사, 이 여인 한나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서 하나님께 다시 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내가 원합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기왕에 사무엘을 주신 것도 감사하고, 그를 하나님께 드리게 된 것도 감사하지만, 하나님이 다시 태의 문을 여셔서 엘가나와 한나 사이에 사무엘을 대신하여 다른 후사를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사무엘도 물론 후사이지만, 사무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쳤으므로, 가정에서 데리고 기를 수 있는 다른 후사들을 주시기를 원한 것이다. 엘가나와 한나 부부는 금년에는 엘리 제사장에게로부터 이런 축복의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목회자가 성도들을 위하여 축복의 말을 하고, 덕담을 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목회자로서, 혹은 성도로서 서로에게 덕담을 하고, 살리는 말을 하고, 복을 주는 말을 하는 것은 얼마나 생명력이 있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창조력이 있는 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왕에 말을 하는 데,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덕이 되고, 살리고, 생명을 주는 말을 하도록 하자.

8.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몇 남 몇 녀를 더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누구 앞에서 자랐는가 (21/참조, 시 127:3-5)?
21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답)        (1) 세 아들과 두 딸
        (2)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해설) 와! 한 때,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 이제 사무엘을 낳아 하나님께 바친 이후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은 것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신 결과이다. 권고하셨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한나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의미이다.
        다시 한번 계산을 해보자. 한나가 15세에 결혼을 했다고 하자. 약 5년간 기다리다 20세 쯤 되었을 때에 엘가나가 브닌나를 취하였다. 그리고 브닌나가 약 15년간 자녀를 낳았다고 치자. 그러면 한나는 이미 35세 쯤 된 것이다. 그때 한나는 사무엘을 얻었고, 한나가 약 40 쯤 되었을 때에 다시 다섯 명의 자녀를 얻은 것이다. 아무리 빨리 빨리 자녀를 얻어서 2년에 한 번 씩 아이를 낳았다고 해도 50세 가까이 자녀를 낳은 것이다. 즉 배란이 끝날 때까지 자녀를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초경을 할 때, 시집을 가서 배란이 될 때까지 3년 터울로 아기를 낳으면, 약 16세부터 아기를 낳아서 약 50세까지 낳으면, 약 12명 정도를 낳는 것이다. 내가 자란 마을의 옆집이 바로 이렇게 열 두 명의 자녀를 낳았다. 한나도 아기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 사무엘을 포함하여 4남 2녀를 얻게 된 것이다.
        다시 한 번 시편 127편의 말씀을 보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으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127:3-5). 자식은 부모가 낳아도, 여호와께서 주시는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여호와 하나님의 상급인 것이다. 전통에 화살이 많이 들어 있은 장사는 무서울 것이 없다. 이렇게 되려면 자녀가 많아야 하는데, 오늘날에는 자녀를 많이 낳지 않는 분위기라 참 그렇다. 로마 카톨릭 교회만 하더라도 산아제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가 함께 있는 곳에서는 시간이 몇 백년 흐르면 당연히 카톨릭이 많아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일제 시대에 활동하였던 불교 스님이었던 시인 만해 한용운은 불교유신론이라는 책에서 개신교 목회자들은 결혼을 하여서 자녀를 낳아 계속적으로 고급 지도자들을 만들어 내는데, 불교는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불교도 스님들이 결혼을 하여서 자녀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벌써 일제시대에 그런 주장을 하니 참으로 시대에 앞서간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우리 교회에 어린아이들이 탄생하는 것을 보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 한 젊은 가정이 오고, 아기를 갖는다. 그러면 베이비 샤워를 한다. 아기를 낳는다. 그러면 백일을 한다, 돌을 한다 하면서 분위기를 돋군다. 또 아기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서로 즐거움을 얻는다. 한 아기가 탄생하여서 자라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마찬가지로 영적으로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서 침례도 받고, 교회에서 양육이 되어서 훌륭한 하나님의 왕국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할 일인 것이다.

9.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또 무슨 일을 들었으며, 그 아들들에게 무엇이라고 먼저 말하였는가 (22-23/참조, 딤전 4:2-4; 5:1-2)?
2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답)         (1)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2)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해설) 불행한 것 중의 하나는 엘리가 매우 늙었다는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나이가 98세였다고 한다! 늙을수록 판단력도 좋아야 하고, 영적으로 더욱 깨어서 영성이 날로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인 것이다. 엘리도 늙었고, 엘리의 두 아들들은 더욱 심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만 우롱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심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일, 즉 간음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회막 문에 여인들이 살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는 많은 참고 구절이 나오지 않지만 있을 법한 일이다 (출 38:8참조).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 간음의 죄를 저지른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사실 종교적인 지도자들이 성적으로 취약한 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기도해야 한다. 우선 지도자들은 앞에 내세워 보이기 때문에 사실보다 더 좋게 보일 수가 있다. 그런 면에서 지도자들이 자기 가정에 처와 자식이 있어서 자기 가정을 잘 보살피고, 자기 가정에서 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바울 자신은 결혼을 하지 않아서 처와 자식이 없었지만 교회의 지도자들은 반드시 결혼해서 자녀를 기르며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어야 교회를 다스릴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딤전 4:2)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4). 이런 면에서 결혼을 하여 자녀를 기르는 사람이 더 일반적인 지도자의 모습인 것이다. 구약에서는 거의 모든 경우에 종교 지도자들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가지고, 자녀를 길렀다. 특별한 경우 예레미야처럼 결혼도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붙들림을 받아서 평행 고통의 삶을 산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또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여자 성도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 어른들은 어머니같이 대하고, 동년들은 자매들과 같이 대하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명령이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딤전 5:1-2). 참으로 단순하다. 가족 같이, 부모 같이, 형제 자매 같이 대하라는 것이다. 적당히 거리를 두라는 것은 없다. 물론 어느 누구도 내 아내와 같이 가까울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얼빠진 지도자들은 자기 아내보다도 다른 여자들이 더 편한 경우도 있다. 젊은 자매들을 일절 깨끗함으로 대해야 하는데, 자기 아내처럼 생각해서 부려먹고 더 심한 생각도 하고, 또한 실제적인 범죄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한 엘리 제사장의 반응은 참으로 무기력한 것이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엘리의 나이를 생각해볼 때, 그는 자기 아들들을 통제하는데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더욱이 그는 그들의 악행, 즉 여호와를 경멸하고,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를 멸시하고, 백성들을 우롱한 죄와,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간음을 한 이 모든 일들이 엘리 제사장 자기 눈앞에서 벌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백성들에게 듣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로 몰라서 그랬는가? 아니면 자기가 알면 눈감아줄 수도 있는데 백성들이 말하니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아마도 전자일 것이다. 그래도 문제는 심각하다. 몰랐어도 문제요, 백성들에게 들어서 알았어도 반응이 문제인 것이다.
        엘리 제사장이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사생결단을 각오하고, 자기가 아들들을 죽일 정도로 잡아주지 않으면, 자기 아들들도 하나님께 죽을 것이요, 자기도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분명하게 말해 주었어야 할텐데, 너무나 약하고 무기력하게 자기 아들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10. 엘리는 그 아들들에게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라고 말하며 또한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24-25상/참고, 레 10:1-2)?
24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답)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해설) 엘리는 계속적으로 무기력한 말만 한다. “그리 말라”는 말로서 들을 아들들인가? “소문이 좋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약한 말이다. 그들이 여호와의 백성까지 죄를 짓게 만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중요한 말을 한마디한다. “너희가 지은 죄들은 인간에게 죄를 지은 것이라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이다. 차라리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이면, 하나님이 판결을 해 주시겠지만, 하나님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할 수 있겠느냐?” 즉, “나도 너희들을 위해서 간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의 말이 이 정도로 끝나서야 되겠는가? 너무나 약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엘리의 나이로 보아서나 영성으로 보아서나 너무나 힘든 상황인 것이다. 엘리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그 아들들에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레위기 10:1-2에 보면, 첫 번째 제사장인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불을 담아 여호와께 분향하였다가 여호와께서 불로 그들을 죽이신 일이 나온다. 엘리 제사장은 누구보다도 그 일을 잘 알았을 것이다. 다른 불을 드렸다고 죽었는데, 자기의 아들들은 백 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의 말은 이렇게 미약했던 것이다.

11. 그러나 엘리의 아들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어떻게 하기로 뜻하셨음이었는가 (25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답)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해설) 엘리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간곡한 권고를 듣지 않았다. 너무 늦은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하더라도 깨달으면 돌아설 수 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늙은 아버지의 말은 얼마나 더 우습게 여겼을까? 백성들에게 빼앗아 먹는 고기가 맛이 있고, 자기 부인을 두고 회막 문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 간음의 죄를 저지르는 것은 너무나 맛이 있어서 그 죄악의 맛을 이겨낼 힘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사무엘상 저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에” 그들의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라는 말로 들리지 않는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은 어느 경우인가? 경건의 시간을 통해서도, 설교를 통해서도, 성경 공부를 통해서도, 개인적인 성경 공부를 통해서 자기의 죄를 지적하여 주는 주변의 어른들을 통해서도 자기들의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문제를 발견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문제인 줄을 모르고, 돌이킬 줄을 모른다면,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한 때인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엘리의 아들들에게만 이 일이 해당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제사장이나 목회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공연히 겁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아간이 심판을 받듯이,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심판을 받듯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심판을 받듯이 하나님은 분명히 심판하실 대상이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돌이켜 회개할 것을 늘 찾아서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경고하시고 책망하시는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그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미 이런 말씀을 들으면 그것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데, 아무런 음성도 들리지 않으면 정말로 위험한 것이다.

12.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누구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는가 (26/참조, 눅 2:40, 52; 딤후 1:3-5)?
26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답)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해설) 엘리의 두 아들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전을 범죄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무엘을 기르신다. 점점 자라는 것이다. 어린아이에서 소년으로 자라는 것이다. 이제 여호와께로 은총을 받을뿐더러 사람들에게도 은총을 받는 것이다. 우리 주님 예수님도 이렇게 자라나셨다. 우리 교회의 신생아부터 어린아이들과 청소년들도 역시 이렇게 자라나기를 기도하자.
        누가복음에 보면 우리 주님의 어린 시절의 성장에 대한 두 구절이 나온다. 첫째는 2:40인에 생후 8일 만에 성전에 올라가 할례를 받은 후, 나사렛에 이른 후의 삶이다. 물론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 이후에 이집트로 도피하였던 시간들을 계산해 넣어야 한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이 말씀은 우리 영아부, 유치부, 유년부, 유초등부의 어린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본문은 12살에 성전에 올라가서 율법선생들과의 대화의 장면 이후의 말씀이다. 51절에는 예수께서 부모님께 순종하며 받드셨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52절이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그러므로 이 절의 우리 청소년들에게 그대로 해당되는 말이다. 사무엘도 우리 주님과 같이 그렇게 자라났다는 것이다. 하나님뿐이 아니라 사람들의 은총을 받으며 자라났다는 것이다.
        아기를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낳기만 하면 스스로 알아서 커줄 것도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어야 한다. 또한 부모님들도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 그 가정의 거룩한 전통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딤후 1:3-5). 우리도 우리 자녀들에게 무엇보다도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한다. 자녀들과 함께 손잡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영적 지도자라고 하여도, 자녀들에게 행함으로 본을 보여주지 않으면, 자녀들은 잘 자랄 수가 없는 것이다. 디모데는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좋은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헬라인 남편에게 결혼하여 우리로 말하면 헬히가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데가 그렇게 훌륭한 신앙인으로 자란 것은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 덕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자녀와 손자 손녀들에게 말씀으로 양육할 책임을 갖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면 할 일이 없다고 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아들들과 딸들의 아이들을 즉 손자와 손녀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물론 우선적으로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책임이 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교회의 젊은 부모들의 부모님들이 이곳에 오시면 가능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신앙 교육을 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자.

13. 오늘의 성경 공부를 통하여 깨달은 바를 각자 나누어 보자.
(답)
(해설)

특별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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