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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과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삼상 1:1-18)

오늘부터 우리는 사무엘상을 공부한다. 사무엘상에는 엘리와 사무엘과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오늘은 엘가나와 그의 두 아내인 한나와 브닌나에 대한 이야기를 공부한다. 브닌나는 자녀들이 있었지만, 한나는 무자하였다. 한나는 그로 인하여 브닌나에게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한나는 그 고통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였다.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여호와께 바치겠다고 서원하며 기도하였다. 제사장 엘리의 말을 들은 한나는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한나와 같이 그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응답을 받는 주의 자녀들이 되자.

1.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으로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살고 있던 사람은 누구인가 (1/참조, 대상 6:34-38)?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답) 엘가나
(해설) 다시 에브라임 사람이 나온다. 사사기에서도 에브라임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었다. 사사기 17장에서 나왔던 미가가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사람이었다. 사사기 19장에 나왔던 레위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던 사람이 에브라임 산지에 살았었다. 에브라임 지파는 남쪽 유다 지파와 함께 가장 주도적인 지파였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이라는 지역은 “숩 족속의 두 언덕”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숩”은 엘가나가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라고 할 때의 숩을 말하는 것이다. “라마”라는 말이 곧 “높은 곳” 혹은 “언덕”이라는 말이다. 이 라마는 엘가나의 고향으로 그의 아들 사무엘이 태어나고 (1:19), 살면서 사역했고 죽어서 묻힌 곳이다 (7:17; 15:34; 16:13; 19:18; 25:1; 28:3).
        역대상의 족보에 의하면 사무엘은 레위의 아들 그핫 (고핫)의 후손인 레위인이다 (대상 6:34-38).
이스라엘 --> 레위 --> 그핫 --> 이스할 --> 고라 --> 에비아삽 --> 앗실 --> 다핫 --> 스바냐 --> 아사랴 --> 요엘 --> 엘가나 --> 아마새 --> 마핫 --> 엘가나 --> 숩 --> 도아 --> 엘리엘 --> 여로암 --> 엘가나 --> 사무엘
그핫 가문의 레위인에게는 에브라임 지파, 단 지파, 므낫세 지파의 영토가 할당되었다 (수 21:5, 21). 일반의 레위인은 25세가 되면 여호와의 전에서 제사장들을 돕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사무엘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께 바쳐져서 젖을 뗀 후에 하나님의 전에 와서 살면서 일생동안 선지자와 예언자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러므로 엘가나가 에브라임 사람이라는 말은 에브라임 족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에브라임에 거하는 거주민임을 말하는 것이다. 엘가나라는 이름은 오직 레위 족속에게만 사용되어졌던 이름이다. 그 뜻은 “하나님이 산 사람,” 혹은 “하나님이 획득한 사람”이다.

2. 엘리에게 한나와 브닌나 두 아내가 있었는데, 브닌나는 자식이 있었지만 한나는 어떠하였는가 (2)?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하나는 무자하더라
(답) “한나는 무자하더라”
(해설) 엘가나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하나는 한나요, 다른 하나는 브닌나였다. 한나라는 이름의 뜻은 “은혜” 혹은 “은혜스러움”이다. 브닌나는 “산호(珊瑚)”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 상급인데” (시 127:3), 브닌나는 그 기업과 상급이 풍성했으나, 한나는 자녀가 한 명도 없었다. 결혼한 여인이 자녀가 없으면 그 고통은 당한 사람밖에는 모를 것이다. 더욱이 일부일처제도가 아닌 상황에서 다른 아내는 자녀가 있는데,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었으므로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 지는 상상이 될 수 있다.

3. 엘리가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로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누가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는가 (3)?
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로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답)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해설) 엘가나가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로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를 드렸다는 것은 그가 레위인의 직무를 행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레위인들은 평소에는 자기 조상에게 배당된 도시에서 살면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행함으로 본을 보여야 하는 직무를 맡고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기업이 되는 땅을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이어받아 살고 있었지만, 레위인들은 기업이 되는 땅이 없이 살아야 했다. 그런 점에서 레위인들은 철저하게 자기들의 주변 백성들에게 의존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레위인들이 열심히 사역을 하여 백성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그 백성들이 내는 십일조를 받아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레위인들이 자기들의 역할을 똑바로 하지 못하면, 백성들이 곧바로 우상숭배에 빠지고, 레위인들은 여호와 신앙을 잃은 백성들이 올바르게 십일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생활고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외적이나 질병 등을 통하여 심판하시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레위인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에도 전시간 목회자와 교회 그리고 성도들과의 관계는 이러한 레위인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와 근본적인 면에서 매우 유사한 것이다. 전시간 목회자들이 교회를 통하여 얻는 수입 외에는 다른 수입이 없이 살게 된 제도는 레위인들에게 기업이 없는 것과 근본적으로 비슷하다. 목회자들이 먼저 자신이 영적으로 살면서 백성들을 가르칠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십일조를 낸다. 십일조는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의 율법이기보다는 가장 기본적인 백성의 책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내는 모든 헌금을 합산하면, 십 분의 이, 혹은 삼까지 내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이 열심히 살지 않고, 목회에 전념하지 않으며 다른 사업을 하려고 하면, 목회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것과 자기 사업을 섬기려고 하는 것 사이에서 갈리게 되고, 그리하면 역시 성도들은 목회자를 전적으로 책임지려고 하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목회자가 수입을 더 늘리려는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교회를 통하여 얻는 수입만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엘가나의 시대에 하나님의 성막은 실로에 있었다. 실로와 라마다임소빔은 서로 그렇게 멀지 않았다. 그러나 엘가나는 자기에게 정해진 때에 레위인의 직무를 다하기 위하여 일년에 한 차례씩 여호와의 전으로 가서 봉사도 하고, 자기 가족을 위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제사 드리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 예배와도 역시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다. 곧 경배하는 것이 예배드리는 것이요, 제사를 드리는 것은 헌금을 포함한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드림이 없는 예배는 없다. 예배는 곧 드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 있으면 드림이 있다. 겉으로 드림이 있는 것 같아도 마음의 드림이 없을 수는 있다. 그러나 마음의 드림이 있으면, 시간도, 힘도, 물질도 드릴 수 있다. 시간도 힘껏 드리고, 에너지도 힘껏 드리고, 물질도 힘껏 드린다. 과부의 두 렙돈을 보시고 주님께서 칭찬하신 것처럼, 우리는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그 사람의 경제적 능력 혹은 여유와 헌금과의 비율이 중요한 것이다.
        금번에 창립11주년 기념 부흥회와 목사 안수식에서 우리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께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드린 것은 참으로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었다. 더욱이 주변의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여 예배한 것은 너무나 흐뭇한 일이었다. 우리도 역시 이웃 교회에서 좋은 집회를 할 때에, 동참하는 미덕이 있어야 한다. 또한 목사 안수식에 참여하여 안수 받는 분들을 격려의 글과 말, 선물과 수표와 현금으로 사랑을 표현한 것은 우리 교회의 앞날을 너무나 밝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모든 것이 레위인을 존중하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요, 또한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전통이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엘가나는 만군의 여호와를 예배했다. 히브리어로는 “여호와 쩨바오트”는 “예와 엘로헤이 하쩨바오트”의 축약형이다. 즉 만군의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축약형인 것이다. 쩨바오트는 만군, 군대, 혹은 무리라는 의미이다. 즉 모든 천군 천사를 거느린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늘의 군대, 하나님의 군대 등을 의미한다. 모든 영적인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영적인 존재들을 만군이라고 말한 것이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들의 아버지인 대제사장 엘리가 너무 나이 많아 늙었으므로 희생제물을 드리거나 할 수 없었으므로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소개되고 있다. 엘리는 물론 대제사장의 역할도 하고 있었지만, 제사장으로서 순번을 따라 돌지 않았고, 일종의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지도하고 있었다.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었는데, 한나에게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4-5상)?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답) 이는 엘가나가 한나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해설) 엘가나는 자기 제물로 예배를 드린 후에 제사장의 몫을 제외하고 자기의 것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이때 그는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녀에게서 난 아들들과 딸들에게는 모두 한 몫을 주었지만, 한나에게만 두 사람의 몫을 주었다. 왜냐하면 엘가나가 한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엘가나가 한나를 편애한 것으로 이해되기보다는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녀를 배려해준 것이다. 사랑은 배려이다. 사랑하는데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단지 이기심이요, 감정일 뿐이다. 성숙한 사람은 배려하는 사랑을 한다. 자기 욕구와 감정과 기분에 충실한 것은 어떻게 보면 순수한 사랑 같지만, 어린 풋내기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위하여 희생할 줄 아는 사랑이다. 그래서 부부간의 사랑, 남녀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등도 아가페의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다. 아가페의 사랑은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다. 돌아오는 것이 있으면 참으로 감사하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아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으면 된다. 돌아오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상이 있으므로 그것으로 만족하면 된다.

5. 그러나 여호와께서 한나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여호와께서 그녀로 성태치 못하게 하므로 한나의 대적 브닌나가 한나에게 어떻게 하였는가 (5하-6)?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답) 그 대적 브닌나가 한나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였다.
(해설) 한나가 잉태하지 못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녀의 태의 문을 닫으셨기 때문이다. 불임의 원인이 보통은 남자에게도 있고, 여자에게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한나에게 문제가 있었다. 왜냐하면 엘가나는 브닌나와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들을 두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브닌나이다. 여호와께서 한나의 태의 문을 닫으셨는데, 그로 인하여 한나를 심히 격동하게 하고 번민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브닌나는 한나의 대적으로 나와있다. 가정 안에서 갈등 구조가 발생하여 이제 가족 사이에 대적이 생긴 것이다. 브닌나는 한나를 깔보았다. “아기도 낳지 못하는 주제에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분수를 알아야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올라가서도 남편이 한나를 배려하여 두 갑절의 몫을 주는 것이 질투가 나서 어찌할 수 없었다. “격동시키다”라는 뜻은 자극을 주다, 격동시키다, 화내지 않고 내심으로 동요시키다라는 뜻이다. 교묘한 수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 화내게 만들되 자기는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브닌나는 자기에게 자녀가 있으므로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면, 한나를 배려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한나를 배려하는 엘가나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브닌나는 다 차지하고 싶었다. 남편이 한나와 함께 자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남편이 그녀와 잘 때, 비아냥거릴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잠을 자도 잉태치 못하는 여인이므로 남편만 아까웠다. 자기는 아이를 갖고, 아이를 낳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또 아이를 갖고, 또 아이를 낳고, 또 젖을 떼면, 또 아이가 들어섰다. 그런데 한나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런 한나를 사랑하는 엘가나가 야속했고, 한나를 괴롭혀서 그녀의 분이 차서 폭발하도록 만들었다.

6.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한나가 울고 먹지 아니하자, 그 남편 엘가나가 한나에게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7-8)?
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답)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해설) 이러한 상황이 한 두 해 동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매년 엘가나가 자기 가족을 이끌고 실로 성소에 올라갈 때마다 이런 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남편이 한나에게 두 몫을 주는 것이 브닌나에게는 계속적으로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브닌나는 다시 한나를 괴롭히고, 격동시켰으며, 그로 인하여 한나는 울기만 하고, 먹을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스트레스가 쌓이고, 고통이 가중될 때, 더 먹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먹는 것을 중지하는 사람이 있다. 스트레스가 쌓을 때 먹음으로서 그 스트레스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은 비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 스트레스가 쌓일 일이 얼마나 많은가? 문제가 발생할 때 울고 먹지 않는 것은 하나의 기회이다. 그 기회를 금식하며 기도하는 시간으로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보다 두 배의 고기를 받았지만 한나는 먹을 수가 없었다. 먹는 것이 하나도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금식은 밥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자연스럽게 시작할 수 있다. 한나는 그녀가 자녀가 없다는 것을 이용하여 브닌나가 그녀를 조직적으로 괴롭히자 먹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여 조직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참으로 비열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행동이다. 우리가 넓은 마음과 포용하는 정신과 태도를 갖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 바라기는 우리 교회에 속한 주의 자녀들은 부디 넓은 마음과 태도를 갖기를 바란다. 형제의 약함과 부족함을 보았을 때, 그것을 덮어주느냐 아니면 그것을 공개하여 고통을 가중시키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갈림길이 된다. 우리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렇게 안타까워하셨던 것이 무엇인가? 외식하는 것이다. 자기들도 문제가 있으면서 문제가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다. 지난번에 말하였듯이 약함이나 부족함이나 실수를 보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자기에게도 문제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철저한 사람들이 있다. 자기는 자기이니까 스스로 변명거리도 얼마나 생기는가? 그래서 자기에게는 관대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실수를 하거나 약점이 보이면 기회는 이때다 하고 쥐 잡듯이 덤벼든다. 이것이 바로 대표적으로 바리새인과 같은 행동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철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용과 포용과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주의 자녀들의 되자. 이것이 바로 우리 공동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로 만드는 길이다.
        엘가나는 한나를 위로한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한나는 브닌나가 그녀를 격동시키고, 조직적으로 그녀를 괴롭혀도 그 사실을 가지고 엘가나에게 불평한 것 같지 않다. 다만 그녀의 고통을 울음과 단식으로 표현한 것뿐이다. 엘가나는 한나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자녀가 없는 것뿐만이 아니라 브닌나가 그녀를 괴롭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다 한들, 그것은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브닌나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화풀이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엘가나는 그가 한나를 사랑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 되기를 바랬다. 그래서 자신이 한나에게 열 아들보다 더 낳은 존재가 아니냐고 하며 한나를 위로한다. 한나에게는 남편의 사랑만으로는 살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남편이 그녀를 더 사랑하면 할수록, 브닌나에게서 오는 고통은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7.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9/참조, 렘 29:11-13)?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답)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해설) 9절은 한글 번역이 애매해서 한나가 엘가나의 위로를 받고 먹고 마셨다는 것인지, 아니면 한나를 제외한 사람들만이 먹고 마셨다는 말인지 불확실하다. 원어나 영어도 역시 불확실하다. 식사시간이 끝나고 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말로 이해가 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한나는 엘가나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먹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18절 말씀에 한나가 먹었다는 말이 나오므로 아마 9절에 말하는 것은 한나가 그들이 먹고 마실 때가지 기다렸다가 그들이 다 먹고 마신 후에 자리를 기도하러 가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엘가나와 브닌나와 한나 사이에 발생한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으신 것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나를 훈련시키시고 그로 인하여 한나로 기도하게 하시려고 이렇게 하시는 것이다. 문제의 출제자가 하나님인 것이다. 엘가나의 위로와 사랑이 도움이 마음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그가 한나를 사랑하면 할수록 브닌나의 투기는 더 클 수 밖에 없기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한나는 문제의 출제자를 보아야만 했다. 우리도 근본적인 문제의 출제자가 누구인가를 잘 알아야 한다. 사탄이 주는 유혹일 때에는 피하면 그만이다. 대적하여 싸워서 이기면 그만이다.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무시하면 그만인 것이다. 마음을 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출제자가 하나님이실 경우에는 피할 수 없다. 무시해서도 안된다. 오직 기도와 금식으로 뚫고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매어 달려야 한다.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기도와 금식으로 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훈련의 기회일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을 통과할 때마다, 우리는 성장한다. 한나는 자기에게 처한 이 고통과 이 괴로움의 근본적인 출처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우리게 고통을 주시는가?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도 고통 그 자체를 목적으로 고통을 주시는 일이 없다. 자식을 죽이려고 하는 부모가 있는가? 정말 간혹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하시는 일이 없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시련과 고통이 하나님께로부터 와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고통을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연단시키고, 죄와 싸워 이기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시며, 우리 속에 금강석보다도 아름다운 속사람을 빚어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말씀하여 주신다. 유배지로 사람들을 보내신 후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속마음을 털어놓으신다 (렘 29:11-13):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이라
11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2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한나는 불임이라는 유배지로 몰려갔다. 한나는 왜 그녀가 그런 상황에 빠져들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 외에는 나아갈 곳이 없었다. 하나님의 그녀에 대한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그녀의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인 것을 믿었다. 우리 교회에게 장래가 있는가? 비전이 있는가? 소망이 있는가? 우리 교회가 정말로 이 지역 사회를 복음화하고, 우리 자녀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건물과 교회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 비전이 있는가? “지금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서 그냥 이렇게 삽시다”라는 생각은 전혀 비전이 없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뚫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르짖고 기도하고 전심으로 찾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우리를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한나가 하나님의 신실성을 붙잡고 하나님께로 나아갔듯이 우리도 현재의 부족함과 약함을 이겨내기 위하여 일어서야 한다. 금번 부흥회에 많은 사람들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하지만, 교회에 평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불신자들이 거의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지금 이대로의 형편으로는 결코 이 지역 사회를 복음화하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우리가 가는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기도의 불이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전도는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복음전도를 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는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기도하기 위하여 일어나는데 대제사장 엘리는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그는 여호와 전 설주 옆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이미 너무 나이가 많았고, 4:18에 의하면 그는 비둔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많은데다가 몸이 비대하고 행동이 둔하니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나는 일어서고, 엘리는 앉아 있었다는 것은 꼭 무슨 상징과도 같다. 한 여인은 고통스러워하며, 여호와께 나아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람, 예민하게 하나님의 일을 살피며, 성도들을 살펴야할 목회자는 자기 몸만 살찌우고 행동은 굼뜨고, 영적으로 예민하지 못하여서 앉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엘리가 꼭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는 본문이다. 성도들이 무엇으로 아파하는지, 성도들이 무엇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지, 성도들이 왜 그렇게 밝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야하는 지 모르면서, 나만 너무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고, 혼자 기뻐하며, 문제 의식 없이 살아가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교회의 보통 성도들보다 더 낮은 자리에 처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목자라면 행군 속도를 어디에 맞추어야 할까? 젊고, 힘있고, 펄펄 뛰는 양들에게 맞추어야 할까? 아니면 어리거나 병들거나 나이가 많아서 잘 걷지 못하는 양들에게 행군 속도를 맞추어야 할까? 만일 내가 젊고 힘있고 펄펄 뛰는 양들에게 속도를 맞추지 않으면, 혹 몇 몇은 내가 리더십이 강하지 않은 지도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약하고, 어리고, 나이 많아서 잘 움직이지 못하는 양들에게 나의 행군속도를 맞추고 싶다. 우리 교회의 행군 속도가 늦다고 하더라고 함께 가기를 원한다. 물론 선발대는 앞으로 갈 수 있지만, 모세가 이스라엘 대군을 이끌 때에 어떤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내가 나보다 형편이 나은 분들과 만날 때에는 그에 맞게 행동하면 된다. 그러나 나보다 형편이 어려운 분들을 만날 때에도 역시 그들과 맞추어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여러 사람을 위하여 여러 모양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아무쪼록 몇 몇 사람을 구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우리 교회가 정말로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모든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면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대해야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구역인 것이다. 교회에는 나오지만 구역에 나오지 않는 사람을 잘 인도해 구역에 잘 나오도록 해야 한다. 우리 교회는 내년에는 구역을 더 강화하여서 구역이 이제는 가정교회나 셀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나아갈 길이다.

8.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무엇이라고 기도 드렸는가 (10-11)?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답)        만군의 여호와여
                -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 나를 생각하시고
                -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해설) 이번이 한나가 하나님께 매어 달린 첫 번째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만큼 신실하고 간절하게 하나님께 매어 달린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한나는 괴로웠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한나는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통곡을 하며 기도하였다. 그녀의 사정을 알아줄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고, 그녀의 문제를 해결하여 줄 분도 역시 하나님뿐임을 알았다. 그녀는 자기의 기도를 남편이 대신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엘리 제사장이 대신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직 여호와께만 매달리기 원했다. 이것이 믿음이다. 문제의 출제자도 되시고, 해결자도 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것이다. 한나는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서원을 하였다. 서원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서원은 하나의 거래가 아니다. 서원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헌신의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한나가 하나님께 요구한 것은 아들을 주시라는 것이다. 그녀의 고통을 하나님이 돌아보시고, 그녀를 생각하시고, 그녀를 기억하시면 아들을 한 명 주십시오 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녀의 기도는 성경 안에 많은 아름다운 기도들과 함께 하나의 아름다운 기도의 모델이 된다. 우리도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돌아보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처한 형편을 보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라고 기도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하신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금번에 안종만 목사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셨듯이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을 아시되 대충 아시는 것이 아니라 “속속들이 아시기”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시기는 하시지만 대충 아시는가? 아니면 정말로 속속들이 아시는가? 한나는 또한 기도함에 있어서 고압적인 태도나 거만한 태도나 심드렁한 태도가 아니라 정말로 낮아진 자세로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하나님이 한나에게 정말로 원하셨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브닌나에게 자녀들을 많이 주신 것처럼 한나에게도 많은 자녀들을 주셨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한나와 브닌나는 누가 더 많은 자녀를 낳는가 경쟁하다가 한 세상을 다 보내고 말았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낳은 사무엘이라는 걸출한 인물은 이스라엘의 역사상에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엘가나와 한나 사이에 사무엘을 주시도, 한나로 하여금 고통을 허락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그녀를 낮아지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간절한 바램으로 나아오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지혜롭다면, 우리는 다른 행동을 중지하고 문제의 출제자 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때 오직 해결자 (해결사가 아니다)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다.
        한나는 하나님이 그녀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약하였다. 그의 머리 위로 삭도가 지나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서원을 하였다. 물론 부모가 자녀를 드렸다고 해서 그 자녀가 그 뜻대로 자라주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모두 하나님께 받았으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자세로 길러야 한다. 우리는 자녀는 무엇이 될 지 모른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자녀를 기를 수 있을까? 그러므로 교회와 함께 아이들이 자라면서, 신앙도 함께 자라고 인격도 함께 자라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교회의 소망은 우리의 자녀들과 함께 가야 한다. 우리 자녀들이 마음껏 뛰어 놀며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필립 요호 목사님을 오늘 오후에 만났는데, 우리 교회는 벌써 내가 오기 이전에 두 목사님이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건축을 하지 않으면, 우리 교회는 지금의 이 상태에 벗어날 수가 없고, 앞으로 나아갈 비전이 부족하다고 하였다. 참으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말이다.

9. 한나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녀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12-13)?
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13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답) 엘리는 한나가 취한 줄로 생각하였다.
(해설) 한나는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였다. 그녀의 심정을 하나님께 털어놓아야 했기에 그냥 그렇게 기도할 수 없었다. 정말 그녀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내어놓아야 했다. 우리는 이 수요 성경공부 시간을 정말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간식 시간을 좀 늦추더라도, 기도 시간을 좀더 늘려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상 명령을 이루는데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를 사용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엘리는 한나의 기도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속으로 그녀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런데 엘리는 그녀의 입술만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녀가 취한 여인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여인을 대제사장 엘 리가 술 취한 여인으로, 술 취해서 인사불성인 여인으로, 술 취해서 술 주정하는 여인으로 보았다. 나이가 많아서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혹은 쉽게 생길 수 있는 오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너무했다. 우리는 이렇게 실수하여서 상황을 잘못 파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0. 엘리가 한나에게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하자, 한나가 무엇이라고 대답하였는가 (14-15)?
14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답)        (1)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2)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3)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해설) 엘리는 상황을 잘못 파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용감하였다. 그래서 한나에게 꾸중과 책망을 하였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이 말이 사실에 바탕한 것이라면 참으로 좋은 것이겠지만, 문제는 잘못된 상황파악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이렇게 상황을 잘못 파악하고 행동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엘리는 한나를 보고 오해하고 그녀에게 직접 말하였지만, 우리는 적은 내용을 듣고, 혹은 잘못된 정보를 듣고, 상황을 잘 모르면서, 함부로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서 혼자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더 넣어서 다른 사람에게 말을 전달하니 나중에는 진실과 다른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입을 다물고 스탑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진정한 해결의 방법은 소문마다 다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묻지 말고, 알려고 하지 말고, 내 삶에 충실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대하는 아주 나쁜 죄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형제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면, 우리는 관심조차 갖지 말아야 한다. 기도해준다며, 기도제목을 나눈다면서 얼마나 많은 말들을 옮기고, 문제를 일으켰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오해한 엘리에게 한나는 겸손하고 진실된 태도로 응답한다. 자기는 슬픈 여자이며, 자기 마음을 여호와께 통하였다고 하며,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다고 하였다. 막상 서원기도의 내용은 엘리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미 엘리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하나님께 서원한 내용이기에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우리는 사실 기도제목을 나누는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보다 더 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도 시간을 좀더 갖자. 그리고 절대로 남이 알아서는 안되는 기도 제목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본인과 하나님만이 알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11. 엘리가 한나에게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자, 한나가 무엇이라고 말하였으며, 어떻게 하였는가 (17-18)?
17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18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愁色)이 없으니라
(답)         (1)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2)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해설) 엘리는 한나가 기도의 제목을 말하지 않는 것이 궁금해서 견디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엘리는 한나를 존중하였다. 그래서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의 인사를 해 준다. 그렇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비록 응답이 인간을 통하여 나온다 할지라도 그 근본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에 만족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고 역사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니의 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 기도하였다면, 이제 맡겨야 하는 것이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은 한나가 엘리에게 기도의 응답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보기도와 호의를 요구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중보기도를 할 수 있고, 마음으로 성원할 수도 있다. 마음으로 성원할 수 없으면, 위하여 기도하는 중보기도를 하기가 어렵다. 한나는 엘리의 호의의 가득 찬 중보 기도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우리 교회가 서로 위하여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를 바라자.
        한나는 이제 먹을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여호와께 털어놓은 후에 먹을 수 있었다.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한 후에 먹을 수 있었다. 우선 순위의 문제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끼니를 건너는 적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만큼 문제 거리도 없는 것이고, 그만큼 성장이 없을 수도 있다. 한나와 브닌나를 비교하여 보라. 브닌나가 뭐 그리 대단하게 기도하였을 것인가? 기도하는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다. 고통의 문제를 안고 기도하는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다. 고통당하고 있는가? 그 고통이 어디에서 왔던 간에 그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리고 해결하심을 받자.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받자. 하나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놓은 후에 하나님 앞에서 평안함을 얻었고, 그리하여 그녀의 얼굴에는 다시 수색 즉, 근심의 빛이 없었다.

12. 오늘의 성경 공부를 통하여 깨달은 바를 각자 나누어 보자.
(답)
(해설)

특별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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