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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과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 (삼상 5:1-12)

블레셋의 이스라엘 침공으로 아벡과 에벤에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무려 3만의 군사가 목숨을 잃고,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하고, 더욱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블레셋은 자기들이 빼앗은 하나님의 궤는 자기들의 신 다곤의 이스라엘 신에 대한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블레셋 다섯 도시 국가 중 하나인 아스돗으로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갔다. 그들은 다곤 신당의 다곤 신상 곁에 하나님의 궤를 두었다. 자,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1.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 어디에 이르렀는가 (1/참조, 막 10:421-45)?
1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답) 아스돗
(해설) 블레셋은 전쟁에서 이긴 후 이스라엘이 전쟁터에 가지고 나온 하나님의 궤를 소중하고도 자랑스러운 전리품으로 획득하게 되었다. 그들은 에벤에셀 전투에서 이긴 후에 해안 바닷길을 따라 내려와서 첫 번째 도시 국가인 아스돗에 이르렀다. 아스돗에는 다곤의 신당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궤를 그곳으로 가지고 간 것이다. 블레셋은 주전 12세기 경에 그리스 남단의 크레타 (갑돌) 섬에서 팔레스틴으로 이주한 유럽인종으로 해양민족이다. 이스라엘은 사사시대의 말기인 사사 삼손의 시절부터 블레셋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였는데,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가서야 블레셋을 완전하게 억누를 수 있었다.
        지난주와 오늘의 공부를 통하여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가지고 전장으로 나갈 때에도, 블레셋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을 때에도 무기력하게 아무런 행동도 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능해서인가?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아서일까?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실 때를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왜 하나님은 종종 무기력하시게 보이실까? 하나님의 침묵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스라엘은 그것을 깊이 생각해 보았어야 한다. 언약궤가 빼앗긴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서로 연결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도 얼마나 무기력하게 죽으셨는가? 마치 하나님이 실패하신 것 같고, 하나님이 무능하신 것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 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본문은 말해준다.
        낮아짐과 섬김과 십자가와 부활의 도는 얼핏 보기에는 무기력하고, 실패하고, 무능한 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길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좌우의 자리를 요구했다. 다른 제자들도 그 이야기를 듣고 분히 여겼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2-45)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으로 볼 때, 제자들의 삶의 철학과 예수님의 삶의 철학은 정반대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신앙이 성숙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의 이 낮아지심, 섬기심,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삶의 철학으로 살지 아니하면, 우리는 여전히 섬김을 받으려하고, 지배하려고 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는 삶의 철학으로 살게 되어 있다. 그러면 결국은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이고, 성화의 길과는 멀기만 한 것이다. 낮아지지 않으면 섬길 수 없고, 섬김의 극치는 십자가이며,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 없이는 올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으로 빼앗겨 가는 수모를 당한 것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것과는 놀라운 상관관계가 있고, 이를 통하여 우리의 삶에서도 섬김과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2. 블레셋 사람들은 아스돗에서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어디에 들어가서 어디에 두었는가 (2/참조, 삿 16:23-25)?
2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답)         (1) 다곤의 당
        (2) 다곤의 곁
(해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의 당으로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들어갔다. 우리가 사사기를 공부할 때, 다곤이라는 블레셋 신이 나온 것을 기억한다. 블레셋의 다섯 방백은 드릴라를 매수하여 삼손의 머리털을 밀고, 삼손을 생포한다. 그들은 삼손의 두 눈을 빼고 옥에 가두어 맷돌을 돌리게 하였다. 그때 블레셋 방백들이 무슨 말을 하였는가?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붙였다.” 그렇게 말한 후 다 모여 그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였다. 백성들도 삼손이 두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것을 보고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우리 토지를 헐고 우리 많은 사람을 죽인 우리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붙였다”하고 자기 신 다곤을 찬송하였다.
        그러면 다곤 신은 어떠한 신인가? 다곤 (Dagon, @/gD;) 은 반인반어(半人半漁)로 머리와 팔과 몸은 사람이고, 다리 부분은 물고기인 신이다. 그러면 바로 인어를 상상할 수 있는데, 남자 인어를 생각하면 곧 다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주전 12세기에 가나안 연안에 정착하자 곧 다곤 숭배를 채용하고, 가사 (삿 16:23), 아스돗 (삼상 5:27), 벧스안 (삼상 31:10) 등에 신전을 갖게 되었다. 다곤은 원래 고대 셈족의 농업신으로서 주전 25세기 이래 널리 숭배되어 왔다. 다곤을 숭배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생산을 증대하는 것이었다. 자녀들을 다산하고, 밭의 소출이 증대되고, 어장에서 고기들이 많이 잡히게되고, 바다에 나가서 풍랑을 이기고, 나아가서 적들과의 전쟁에서 이기도록 복을 내리는 신으로 숭배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블레셋 사람들은 왜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곤 신상 곁에 같다가 두었을까?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일종의 임재로 보고, 하나님이 다곤에게 포로로 잡혀 온 것을 상징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다곤에게 숭배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였던 것이다. 블레셋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하고, 다곤을 높임으로써 자신들과 그들의 신의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3.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은 것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였는가 (3)?
3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답)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음
(해설) 그런데 역사는 밤에 쓰인다고 하였듯이 밤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떤 일이 정확하게 밤에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아스돗의 블레셋 사람들은 아침에 그들의 눈을 의심할만한 일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보는 누구에게나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 굴복하여 여호와께 경배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정말 여리고의 기생 라합 정도라면 이 사건을 통해서라도 참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블레셋의 어떠한 누구도 그렇게 하였다는 증거가 없다. 그들은 기분이 이상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우연한 상황으로 치부하면서 그들의 신상을 일으켜 본래 있었던 자리에 세웠다.
        우상은 원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나무로 만들어서 세워 놓은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은 블레셋 사람들로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블레셋 사람들은 이 일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보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기분 나쁜 일이 왜 생겼을까 하고 그냥 다곤을 제 자리에 세워 놓기만 했다. 일차로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그것이 경고인지도 모르고 지나가게 된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그것이 경고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늘 다가오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음성에 예민해야 한다.

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어떻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가 (4/참고, 욘 4:10-11)?
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답)        (1)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2)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3)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음
(해설)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낮 동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는데, 밤사이에 다시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 일은 지난 번 일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은 것은 지난번과 같았지만, 이번에는 다곤의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진 것은 곧 전쟁터에서 사람들이 죽은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비록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3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죽도록 하셨지만, 그것은 블레셋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블레셋은 그 전쟁을 자기들이 이스라엘을 이기고, 자기들의 신이 이스라엘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이긴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간단하게 다곤의 머리와 두 손목을 끊으심으로 이번 전쟁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지신 것이 아니라 다곤을 심판하기기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경고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블레셋은 분명하게 알았어야 한다. 다곤이 하나의 조립품도 아닌데, 왜 다곤의 머리와 두 손목이 잘라졌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들은 그냥 황당했을 뿐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이번에도 사람이 아닌 우상을 치심으로써 블레셋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욘 4:10-11). 극악무도한 니느웨 사람들과 그곳에 있는 아이들과 육축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이 왜 블레셋 사람인들 사랑하시지 아니하셨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블레셋 사람들을 집적 치신 것이 아니라, 블레셋의 신 다곤을 치신 것에는 어떤 경고적인 면도 있지만, 분명히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5.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당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어떠한 관습을 갖게 되었는가 (5/참조, 요 8:31-32; 고전 9:19-23)?
5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당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답)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함
(해설) 그러나 블레셋은 그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의 관습만이 더 생겼을 뿐이다. 다름이 아니라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당에 들어가는 자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않는 관습이 생겨난 것이다. 바로 그 문지방에 다곤의 잘린 머리와 잘린 두 손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는 매우 많은 금기 사항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문지방을 밟지 않는 것이다. 문지방을 밟으면 부정을 입는다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면 가장 복을 받는 것 중의 하나가 그러한 금기 사항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비본질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게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32). 비본질적인 것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을 따르기 보다는 관습이나 습관이나 전통을 따르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본질과 비본질 사이에서 본질을 얻기 위하여 비본질을 절대적으로 포기하는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9장에 나오는 바울의 선언인 것이다.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Though I am free and belong to no man,
        I make myself a slave to everyone,
        to win as many as possible.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To the Jews I became like a Jew,
        to win the Jews.
        To those under the law
        I became like one under the law
        (though I myself am not under the law),
        so as to win those under the law.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To those not having the law
        I became like one not having the law
        (though I am not free from God's law but am under Christ's law),
        so as to win those not having the law.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To the weak I became weak,
        to win the weak.
        I have become all things to all men
        so that by all possible means I might save some.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I do all this for the sake of the gospel,
        that I may share in its blessings.
우리를 흔들리게 하는 것이 비본질적인 것이면 우리는 그저 참고 견디면 된다. 그리고 고칠 수 있는 것이라면 고쳐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고수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 본질적이 것이고 비본질적인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바울에게 본질적인 것은 예수님과 복음이었다. 그는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을 전하기 위하여 다른 것들은 다 수용자들의 입장에 맞출 수 있는 태도가 되어 있었다. 바울이 말하기를 “여러 모양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라”고 하였다.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도 부족하고, 우리의 살아오던 방식을 버리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버리기도 쉽지 않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가
        “하나님이여
        나에게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을 주시고,
        내 힘으로 고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th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라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여
        나에게 본질적인 것은
        사수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나에게 비본질적인 것은
        양보할 수 있는 아량을 주시고,
        이 두 가지의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을 넓혀서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교제를 나누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복음을 전하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6.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어떻게 하셨는가 (6/참조, 삼상 6:4)?
6@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니
(답)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였음
(해설) 아스돗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의 때와 경고의 때를 놓쳤을 때, 드디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다.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손은 그러므로 여호와의 심판의 손이신 것이다. 우리는 자비의 때가 곧 경고의 때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자비의 하나님이 동시에 심판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에 임하자, 독종이 그들에게 임했고, 그 독종이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임한 독종은 무엇일까? 아마도 학자들은 흑사병(黑死病) 곧 페스트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음 장에 4절에 보면 블레셋이 하나님께 드릴 속건제로 “블레셋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보낸 것을 볼 때, 들쥐로 인한 페스트를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과연 들쥐에 의한 페스트라고 해도, 그러한 과학적인 사실을 주전 10세기 경의 블레셋 사람들이 알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도하지만, 어찌하였든 이 독종은 무서운 전염병으로 아스돗 사람들을 친 것이다. 주후 14세기 경의 유럽은 흑사병 (페스트 혹은 출혈열, 즉 에볼라)으로 전 인구의 1/3정도를 잃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었다.

7.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7)?
7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답)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고 함
(해설) 이제 블레셋 사람들은 깨달았다. 이스라엘의 신의 궤가 그들에게 있으면, 이스라엘의 신이 그들과 그들의 신 다곤을 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자기들의 신이 더 강하다는 환상이 산산이 깨어지는 순간인 것이다.

8. 이에 보내어 블레셋 사람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라고 한 후, 그 방백들이 무엇이라고 결정하였는가 (8/참조, 삼상 17:4)?
8        이에 보내어 블레셋 사람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 갔더니
(답)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가라”
(해설) 블레셋의 다섯 도시는 아스돗, 가드, 에그론, 아스글론, 그리고 가사이다. 아스돗의 방백은 나머지 네 도시들의 방백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방백들의 대책회의를 하였다. 그들의 회의 제목은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하는 것이었다. 정답은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라”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오답을 결정하였다. 즉 “이스라엘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가라”는 것이었다. 가드는 그 유명한 골리앗의 출신지이다. 즉 가드에는 거인들이 많이 살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가드는 다른 도시들에 비하여 더 강하게 느껴졌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가드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드의 방백과 사람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하나님의 궤를 받게 된 것이었다.
        결정적인 해결책이 아닌 미봉책은 더 큰 문제를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결정적인 해결책인 회개를 하지 않고 미봉책으로 언약궤를 전장으로 옮겨 갔다가 큰 실패를 하였듯이, 이제 블레셋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지 않고 커다란 고통을 입게 된다.

9. 하나님의 궤를 가드로 옮겨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에 더하사 어떻게 되었는가 (9)?
9        그것을 옮겨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에 더하사
        성읍 사람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종이 나게 하신지라
(답) 성읍 사람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종이 나게 하셨다.
(해설) 역시 독종이 가드를 덮쳤다. 여기서 작은 자와 큰 자는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이라는 의미인지, 신분이 낮은 자부터 높은 자까지라는 의미인지, 작은 사람부터 큰 사람까지라는 의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일 마지막 의미라면, 골리앗과 같이 큰 자들도 독종에는 어찌할 수가 없음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0.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자, 그것이 에그론에 이른즉 그들이 무엇이라고 부르짖었는가 (10)?
10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가로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답)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해설) 가드 사람들은 얼른 하나님의 궤를 가장 가까운 에그론에 보내었다. 마치 불덩이를 받은 사람이 그 불에 데면서 그 불덩이를 다른 옆에 있는 사람에게 던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것은 에그론 사람들의 동의를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르자 에그론 사람들이 부르짖게 된 것이다. 그들이 즉, ‘가드 사람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 즉 에그론 사람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고 한다’라고 소리쳤다. 당연한 것이다. 이미 에그론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가 가는 곳에는 독종의 무서운 재앙이 임한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이것은 비단 에그론뿐만 아니라 모든 블레셋 전체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11. 이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무엇이라고 결정하였는가 (11상)?
11        이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하니
(답)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해설) 그래서 다시 블레셋 다섯 방백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이번에는 바른 결정을 하였다. “이스라엘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참으로 바른 결정이다. 어디 비단 하나님의 궤뿐이랴? 우리 것이 아닌 것을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있다면, 그 원주인에게로 돌려보내야만 한다.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취해만 하는 바른 태도인 것이다. 강자가 약자의 것을 마음대로 빼앗고, 강국이 약국의 것을 마음대로 빼앗는 시대가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일이 계속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직하게 일해야 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12. 블레셋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하여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종으로 치심을 받아 무엇이 하늘에 사무쳤는가 (11하-12/참조, 출 2:23-25)?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12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종으로 치심을 받아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답) 성읍의 부르짖음
(해설) 여기서 하나님의 손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독종으로 죽었다는 말인지, 독종 이외에 다른 심판이 있었다는 말인지는 불분명하다. 독종으로 죽은 사람이 있고, 독종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다는 말로 이해되어진다. 그리하여 산 사람들은 부르짖었고,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 (The outcry of the city went up to heaven) 마치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통을 당하던 때가 생각난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출 2:23-25).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고통의 순간에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미련한 것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고통의 순간이 오기 이전에 미리미리 회개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이다.

13. 오늘의 성경 공부를 통하여 깨달은 바를 각자 나누어 보자.
(답)
(해설) 오늘의 공부를 통해서 배운 또 한 가지의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지 않으면, 그들도 고통을 당할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덩달아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 오늘의 기도 제목 ***
1. 하나님의 역사를 잘 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하소서.
2. 본질적인 복음을 전하기 위해 비본질적인 것을 양보할 수 있는 정신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3. 2월 25일부터 실시하는 목적이 이끄는 삶 캠페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하소서.
4. 2월 27일 28일에 실시되는 청소년부 30시간 기아 체험 행사를 통하여 우리 청소년들에게 심령의 부흥을 체험하게 하소서.
5. 시작된 대심방을 통하여 성도의 진정한 교제가 이루러지게 하소서.

특별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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