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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파노라마 제 23 강 (4/5/06)
제 4-19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7)
오늘 공부할 부분은 사무엘상의 마지막 부분으로 사울의 몰락이 나온다. 사무엘상 26, 27, 28, 29, 30, 31장을 다룬다.

제 26 장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다시 사울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긴다.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신 왕을 자기가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1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이르러 가로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오늘 본문은 24장과 매우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분명히 다른 사건이다. 십 사람들은 23장에서도 다윗이 자기들의 성읍 근처 수풀에 숨어 있을 때, 사울에게 밀고한 사람들이다. 이번에도 또 사울에게 밀고하였다.

2        사울이 일어나 십 황무지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과 함께 십 황무지로 내려가서
이전과 같이 사울은 이번에도 3,000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다윗을 잡으려고 십 황무지로 내려갔다.

3        광야 앞 하길라산 길 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황무지로 들어옴을 깨닫고
사울은 하길라산 길 가에 진을 쳤다. 다윗은 황무지 즉 사막 지역에 있었고, 사울이 자기를 따라 황무지에 들어온 것을 알게 되었다.

4        이에 탐정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이제 다윗은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하여 탐정을 보내었다. 그리고 사울이 분명히 그곳에 이른 것을 알게 되었다.

5        일어나 사울의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대장관 아브넬의 유하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다윗은 수하에 몇 사람을 데리고 사울이 있는 곳으로 갔다. 물론 깊은 밤이었다. 사울과 그의 삼천 명의 군사는 사울과 아브넬을 중심으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먼 곳에서부터 행군해서 왔기에 더욱 더 피곤하였을 것이다.

6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가로되
                누가 나로 더불어 진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아비새가 가로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다윗은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 둘 중의 하나만을 데리고 사울의 진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아히멜렉은 헷 사람이라는 것을 보아서 분명히 이방인이다. 나중에 다윗에게 충성하였던 장군 우리아 (밧세바의 남편)도 아히멜렉과 같은 종족이었다. 이와 같이 다윗에게는 많은 이방인들이 모여들어서 생명을 바치는 충성을 다하였다. 하나님의 왕국에 이방인의 신분으로 와서 충성하는 것을 보면, 우리도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의 왕국의 백성이 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스루야는 다윗의 누이이다. 다윗에게는 스루야와 아비가일이라는 누이가 있었다 (대상 2;16). 스루야의 남편에 대하여는 나오지 않는다. 아마 아들 셋을 낳고 일찍 죽었을 수도 있다. 스루야는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라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다 용맹하였고, 일찍부터 다윗에게 합류하여 다윗에게 충성하였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은 다윗에게 누나의 아들로서 조카들이었다. 이중에 특별히 요압은 종종 다윗의 뜻을 거스려서 다윗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는 결국 솔로몬이 왕이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다가 솔로몬에 의해서 죽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이방인들은 죽기를 다하여 충성하는데, 오히려 다윗의 혈육들은 다윗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종종 태도가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태도를 갖기를 소망하자. 뼈를 깎는 아픔이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아히멜렉보다 아비새가 먼저 다윗과 함께 가기를 자원하였고, 그리하여 다윗은 아비새를 데리고 사울의 진중으로 들어간다. 다윗이 얼마나 용맹한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혔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군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 중에 하나가 보초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사울은 삼천 명이나 되는 군사를 동원하고도 보초를 세우지 아니하였다. 아니면 보초를 세울 겨를도 없이 피곤에 지쳐서 잠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사울을 중심으로 빙 둘러서 잠에 들었던 것이다. 물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잠에 들게 하셨지만 (12), 영적으로 볼 때, 사울은 신앙의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이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12-14). 사울은 자기의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였기에 육신으로나 영적으로나 깊은 잠에 빠졌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정욕을 위하여 살면 신앙의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삼천이나 되는 군사를 지휘하고 있으면서도 보초병 하나 똑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사울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마 요나단은 다윗을 잡으러 다니지 않았을 것이고, 요나단과 다윗이 없는 사울의 군대는 오합지졸에 가까웠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왕국과 교회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는 우리가 되도록 하자.

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아비새는 좋은 기회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도망자의 생활, 쫓겨 다니는 생활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풍찬노숙 (風餐露宿)의 생활이 그 몇 해였던가? 이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아비새는 그의 일을 정당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라고 하였다. 자기의 일을 정당하게 생각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거명하는 경우가 있다. 혹은 정말 그렇게 믿고 하나님을 거명하는 경우도 있다. 아비새는 아마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중요한 것이 있다. 아비새는 자기가 하려고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아마 보통 사람들도 아비새와 같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그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 다윗의 허락을 구하였다. 자기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지만, 자기의 인간적인 지도자인 다윗의 허락을 구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아비새의 아름다운 자세를 볼 수 있다.

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아비새의 아름다운 태도에 이어서 다윗은 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다윗은 일언지하에 사울을 죽이지 말라고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에게 손을 들어서 그를 치면 절대로 죄가 없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윗은 그 고생을 하면서도 절대로 원칙에 있어서 양보하지 않는 당당함이 있었던 것이다. 다윗에게 있었던 수많은 미덕 중에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 실례들은 후세에 많은 사람들에게 길이 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을 치면, 자기도 또한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누가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자기를 칠 수도 있다는 것을 다윗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는지도 모른다.

10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다윗은 계속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이 말씀 한 마디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병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돈의 문제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이 문제도 넘어갈 수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그 순간이 바로 주님이 나를 안고, 업고 가신 시간이라는 것을 그 힘든 순간에는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안다면 나는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욥은 가장 고통스러울 때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쓰여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욥 19:23-27). 우리는 이미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뵈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8-9). 욥이 그렇게 보려고 하였던 것을 베드로는 보았고, 베드로 이후에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고,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도 역시 예수님의 구원을 받고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하고,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가득하기를 빈다.

다윗은 자기나 자기의 사람이 사울을 치는 것 대신에 하나님께서 그를 치시기를 바랐다. 그것도 지금 당장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빈 것도 아니다. 죽을 날이 이르거나 즉 자연적으로 늙어서 병사할 때까지 도망 다니며 살 각오를 한 것이다. 아니면 전쟁터에 나가서 적군의 칼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 손으로, 나의 부하의 손으로 죽이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다윗의 마음씨인가?

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누구든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여호와의 종을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함부로 말한다.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목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특히 목회자를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목회자를 비판하는 태도를 가지고서는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교회나 목회자를 비판하는 태도를 가지려면, 그만큼 자기가 더 바른 생활을 해야 하는데, 비판하는 시각을 가지면, 비판하는 정신이 충만하여서 비판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허비해서 사랑하고, 충성하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모범을 보이는 데는 시간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이제 사울에게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가자고 아비새에게 말하였다. 군인이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창은 공격과 수비의 중요한 무기이다. 물도 역시 생명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다윗이 여기서 사울의 창과 물병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당신은 나에게 생명을 빼앗겼을 수도 있습니다.”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지난번에 사울의 겉옷 자락, 왕의 겉옷 자락을 벰으로써 왕의 권위에 손상을 입혔다. 이번에는 창과 물병을 가지고 옴으로써 사울에게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울과 그의 사람들에게 잠들게 하셨다. 잠이 곧 심판인 경우도 있다.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갈 때, 결국은 배 밑창에 가서 잠에 들었듯이 (욘 1:1-6), 사울과 그의 삼천 명도 깊은 잠에 들었던 것이다. 선장은 요나에게 “자는 자여 어찜이뇨?”라고 다그쳤다. 우리가 신앙의 잠을 잘 때, 불신자가 우리를 발로 차서 깨우면서 “자는 자여 어찜이뇨?”라고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하시는 음성을 듣지 못하면, 불신자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13        이에 다윗이 건너편으로 가서
        멀리 산꼭대기에 서니
        상거가 멀더라
이제 다윗은 건너편 산으로 간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선다. 직선거리는 가깝지만, 실제로 걸어가려면 거리가 먼 곳에 가서 선 것이다.

14        다윗이 백성과 넬의 아들 아브넬을 대하여 외쳐 가로되
                아브넬아 너는 대답지 아니하느냐
        아브넬이 대답하여 가로되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다윗은 이제 아브넬을 부른다. 사울 왕을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울을 경호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 바로 아브넬이기 때문이다.

15        다윗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중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중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다윗은 아브넬이 왕을 지키지 못하고 잠에 든 책임을 경각시킨다.

16                네 행한 이 일이 선치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그러고 아브넬에게 그 증거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찾아보라고 한다. 아브넬은 순간적으로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오늘 본문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17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듣고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다윗이 가로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다윗이 아브넬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사울이 잠에서 깨어서 상황을 파악하고, 다윗에게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때는 밤이고 서로의 모습을 자세히는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사울은 더욱 더 다윗의 음성에 자신의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밤에는 소리가 더 잘 들리고 멀리 가기에 이들이 서로 대화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울은 다윗에게 이것이 너의 음성이냐고 묻고 다윗도 그것을 시인하였다. 사울은 다윗을 잡으러 왔다가도 막상 보면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든다. 또 다윗도 사울에게 예의를 다 갖추어 말한다.

18        또 가로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다윗은 다시 사울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사울을 설득하려고 시도한다. 자기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이 있기에 자기를 잡으려고 쫓아다니느냐고 묻는다. 세상의 법대로 말하자면, 다윗이 가장 잘못한 것은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기름부음을 당한 것이다. 사울이 그것을 알지 모를지 모르지만, 사울이 볼 때, 그리고 많은 사람이 볼 때, 다윗은 사울 다음에 왕이 될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울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고, 자기의 왕위가 견고해지며, 자기의 아들 요나단이 아무런 문제없이 왕이 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19                청컨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인자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날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다윗은 자기의 고난의 의미를 정확하게 몰랐다. 사울을 격동시키는 자가 하나님인지, 여호와이신지도 몰랐다. 다윗의 도망자로서의 삶은 그저 여유 있고 낭만적인 삶이 결코 아니었다. 만일 하나님이 사울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다윗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서 사울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만일 사울로 하여금 다윗을 추적하게 하는 이들이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여호와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다윗은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윗으로 하여금 결국 이스라엘의 영토, 즉 여호와의 기업의 밖으로 내어 몰아서, 다른 신들을 섬길 수밖에 없게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다윗을 그렇게 내어 모는 존재가 다름 아닌 사울이라는 점이다. 물론 하나님이 사울을 그렇게 사용하심으로써, 다윗을 훈련시키시는 것이지만, 다윗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힘든 하루, 하루의 삶이었다.

다윗은 무엇이 제일 힘들었을까? 그는 놉에 있는 여호와의 집에서 아히멜렉 제사장의 축복을 받으며 도망자의 생활을 한 이후로 여호와의 집에 다시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것이다. 그는 이것이 제일로 힘들었다. 제사장들과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과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기를 원했지만, 지금까지 그것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윗이 지금 절감하고 있는 것은 사울에게 이렇게 쫓겨만 다니면 결국 이스라엘 지경 밖, 여호와의 기업 밖으로 쫓겨날 것이고, 결국 영영히 하나님의 집에 거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윗은 한 때, 이런 시구를 쓴 적이 있었다. 도엑이라는 사울의 목자장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85명을 몰살했을 때 지은 시이다.
1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더라 말하던 때에)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3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4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5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
6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저를 비웃어 말하기를
7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8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8절에 나오는 것처럼 다윗은 정말로 하나님의 집에 거하기를 원했다. 어떻게 거하기를 원했으냐 하면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푸른 감람나무 같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곳에 나무로 심겨져 있어서 언제나 그곳을 떠나지 않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사울이 자기를 잡으려고 쫓아다니기에 결코 하나님의 집에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나님의 집에 있으면 푸른 감람나무처럼 융성하게 될 것이다. 그런 복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 앞에 모이는 예배를 소중하게 여겨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나는 여기에 있는 여러분 하나, 하나를 너무나 소중하게 여긴다. 여러분 모두가 너무나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한 번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복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비록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곳에 왔지만, 하나님께서 한없는 새 힘으로 복 주시기를 원한다.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결국 여호와를 믿는 신앙과 이방 신을 믿는 신앙 사이의 문제, 즉 영적인 문제로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모든 문제를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다 좋은 것이다. 일도 해야 하고, 가정도 좋고, 공부도 좋다. 건강도 중요하고, 취미도 좋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교회에 오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찬양하며,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기회를 점점 줄여나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아무리 달콤하고, 아무리 중요해 보여도 영적인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다윗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셔서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존중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생명을 걸고 저항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20                그런즉 청컨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곳에서
                이제 나의 피로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이제 다윗은 자기가 있는 곳이 “여호와 앞에서 먼 이곳”이라고 표현한다. 다윗의 이 표현을 할 때, 그의 심정을 상상해 보았는가? 얼마나 가슴이 절절하게 메어지는 표현이었을까?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은 데,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이 다윗에게는 심지어 영적인 불안과 공황 상태에까지 몰아붙였을 것이다.

이제 다윗은 사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나를 죽이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즉, “나의 피로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한다. 자신을 죽여서 무고한 피를 흘리지 말라는 것이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그저 여유 있게 따돌리거나, 사울을 놀려가며 도망 다닌 것이 아니다. 언제나 사망의 손길이 그의 곁에 있음을 감지하였다. 자기가 돌보아 주고, 자기가 함께 하는 이웃들이 그를 사울에게 신고하는 입장에서 그는 한 번도 편한 잠을 자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광야 생활, 산중 생활이 그에게 너무나도 고역이었던 것이다.

이제 다윗은 사울이 메추라기 사냥하는 것처럼 사냥을 나왔다고 하였다. 사울이 3000명이나 되는 군인들을 이끌고 겨우 메추라기 사냥을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겨우 벼룩 한 마리 수색하고 있는데, 그 벼룩이 바로 다윗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다윗이 자기를 겸비하게 말함으로써, 사울에게 불안감을 없애려고 하였던 것이다. 다윗의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가 일삼아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은 낮추어 말하고, 자신은 높여서 말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정확하게 반대로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공격을 받지 않는 것이다.

21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 되었도다
이제 사울의 반응을 보자. 사울은 한 마디로 자기가 범죄하였다고 고백하였다. 다윗의 말이 얼마나 감동스러운 것이었으면, 사울은 즉각적으로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돌아오면 잡아서 죽일 것이라고 생각되기에 다윗은 사울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울은 대신에 다윗이 자기의 생명을 귀중히 여겨서 두 번씩이나 살려 주었기에 이제 다시는 다윗을 해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자신이 대단히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대단히 잘못 되었다고 하였다.

사울의 이 회개가 어느 정도로 진실한 것이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순간으로는 진실했을 수 있다. 그러나 회개는 지, 정, 의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또한 지속적인 것이어야 한다. 사울의 회개는 단순히 감상적인 면이 강했고, 결국 감정적인 자기 후회에 그치고 만 것이다. 자기 푸념과 자기 넋두리에 지나치지 않는 회개는 결국 유다와 같이 우울증에 빠지게 되어 자살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어떠한 잘못을 알았을 때, 그것을 느끼고 시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다시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다시 반복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 이제 나는 그 죄를 다시 범할 것이 너무나 정확하기에 회개하지 말까? 이것이 바로 사탄이 주는 생각이다. 우리는 하루에 일곱 번씩 잘못을 해도, 일곱 번씩 회개해야 한다. 모아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달은 그때, 그때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7:1-4절이다.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많은 죄들이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며, 그것이 곧 실족의 상황 즉 형제나 자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상황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하루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 아니 칠백 번도 범죄를 한다. 중요한 것은 죄를 지으면서 깨닫지도 못하고, 깨닫고도 뻔뻔하게 그냥 지나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루에도 일곱 번이라도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죄를 그렇게 많이 회개하는 것이 진실성이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회개 그 자체인 것이다.

22        다윗이 대답하여 가로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다윗은 사울에게서 가지고 온 창을 보여주며 가져가게 한다. 이제 시각도 어느 정도 발달해서 다윗이 들어 보인 창이 사울의 눈에 들어 왔다. 다윗은 사울에게 창과 물병을 돌려 주었다. 즉, 그의 생명을 분명하게 돌려 준 것이다.

23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하나님께 각자의 행한 대로 갚아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왕이 되었고, 사울은 전쟁터에서 죽은 것이다.

24                오늘날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다윗은 기도로 그의 말을 마친다.

25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또 사울도 다윗을 축복한다. 그리고 서로 헤어진다. 사울의 발걸음이 얼마나 쓸쓸했을까? 아브넬을 포함한 3천의 군사들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제 27 장

다윗은 자기의 모든 사람들을 이끌고 블레셋 가드의 방백 아기스에게로 정치적인 망명을 하였다. 아기스는 다윗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울의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유리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다윗은 아기스를 철저하게 속인다. 다윗의 유다 남부에 거하는 자기 민족의 적들을 철저하게 진멸하면서, 아기스에게는 유다 민족과 친 유다 민족들을 침공했다고 하였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속아 다윗이 이스라엘의 영원한 적과 자신의 영원한 신하가 될 것으로 믿었다.

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사울은 다윗에게 화해의 손짓을 했지만, 다윗의 입장에서는 사울에게 갈 수가 없었다. 이미 너무 멀리 떠나 있었던 것이다. 사울은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다윗이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전에 들은 말 중에 “당신의 십 년 후의 모습이 궁금한가? 지금 대단하게, 특별하게 노력하지 않는 한, 당신의 10년 후의 모습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정말 변하고 싶으면,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매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두 번 감정적으로 먹는 마음뿐이지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사울을 믿지 못했지만, 사울의 입장에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을 믿도록 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울은 그만큼 다윗을 얻으려는 노력이 없었다. 얻기는커녕 기회만 되면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사울의 감정적인 고백이 한두 번 있었다고 해서 600명과 그 가족들을 이끌고 사울의 수하로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윗은 오히려 사울이 아닌 아기스를 택하였다. 아기스를 택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고도로 계산되고, 치밀하게 계획된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우선 사울을 피하는 것이 가장 큰 급선무였다. 사울의 통치권이 미치는 곳을 벗어나면 사울의 추격을 받지 않을 것을 다윗은 너무나 잘 알았다. 이전에 다윗은 동일한 블레셋 가드 방백 아기스에게로 도망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에는 혈혈단신 혼자의 몸이었다. 그때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을 때, 미친 연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입장이 다르다. 그는 이제 600명이라는 야성적인 들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다윗의 이러한 결정이 하나님과 함께한 생각이냐는 것이다. 그가 기도를 하거나, 제사장과 상의를 하거나, 우림과 둠밈 혹은 제사장의 에봇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거나 하여서 결정하였느냐는 것이다. 본문은 다윗의 이번 결정이 자신의 생각의 결과라고 말해준다. 600명을 데리고 사울과 대항하여 싸우는 것도 아니고, 사울을 일방적으로 피하여 다니는 것이 너무나 한계가 있었다.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 무엇 하나 변변한 것이 없다. 언제 외적의 침입을 받을지, 천재지변을 당할지, 사울의 군사들에게 포위 공격을 받아 전멸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물었어야 하지 않을까?

동일한 결정이 나더라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과 우리의 마음대로 하는 것은 너무나 다르다. 계획과 결정의 단계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면 그 과정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마치 공부할 때, 세미나 페이퍼 쓰는 것과 비슷하다. 나처럼 실력이 없는 학생은 처음 밑그림을 그릴 때부터 열심히 선생님을 찾아간다. 그래서 처음부터 상의한다. 한 한기에 한 과목에 한 개의 페이퍼를 쓰면서 계속 열심히 찾아간다. 그러면 결국 그 페이퍼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생각과 의도가 함께 녹아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발표할 때, 내가 조금 서툴러도 선생님이 오히려 다른 학생들에게 설명하여 주기도 한다. 학점을 줄 때에도 자신의 혼이 들어갔기에 가장 좋은 학점을 주게 된다. 이렇게 한 학기에 두 과목을 들으면서 페이퍼 두 개를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거의 한두 번도 교수님을 찾아가지 않는다. 그냥 자기 마음대로 최선을 다해서 페이퍼를 작성한다. 이제 제출 일이 되고, 발표 날이 되어서 발표를 한다. 선생님도 심지어 내용 파악을 하기가 힘들다. 물론 완벽하게 써오면 좋겠지만, 아무리 유능한 학생이라도 선생님의 지도 없이 완벽하게 써오기가 힘들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가서 처음부터 다시 쓴다는 것은 아무리 유능한 학생이라도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면 결국 학점을 받지 못하고 공부를 포기해야만 하는 결과를 빚는 것이다. 하물며 졸업 논문은 더 많은 공동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라는 페이퍼를 쓸 때, 처음부터 계획의 단계부터 하나님과 기도로 상의하자.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배우자.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나와 함께하시도록 하자. 사업을 하던, 연구를 하던, 공부를 하던, 아이를 기르던,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도록 해야 한다. 기도를 해야 하나님의 인도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증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일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목사 혼자서 기도하면서 자기 확신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혜, 회중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면서 회중과 함께 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하고,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발전시켜 나가고,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아무래도 자기 혼자 생각대로, 선택의 결과가 하나 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블레셋 행을 택하였다. 블레셋은 다윗의 원수 나라 제 1 호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효용가치를 믿었기에 자기가 블레셋에 가도 자기를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계산하였다. 다윗이 블레셋에 있으면 이스라엘이 지고, 다윗이 이스라엘에 있으면 블레셋이 질 것이라고 생각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과연 다윗다운 치밀한 계산임을 알 수 있다.

2        일어나 함께 있는 육백 인으로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다윗은 전격적인 정치적 망명을 감행했다. 이러한 다윗의 결정은 블레셋 사람들의 눈에는 다윗의 투항으로 비쳤을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고 핍박하여 결국은 블레셋의 원수인 다윗의 블레셋의 충신이 될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가드의 방백 아기스의 눈에는 더욱 그렇게 비쳤을 것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뜻있는 사람들은 다윗이 블레셋으로 간 것은 너무나 기가 막힌 일이라고 한탄하였을 것이다. 다윗을 핍박하는 사울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블레셋으로 투항하는 것은 더욱 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만큼 다윗의 행동은 보통 사람들의 눈을 속인 것이다. 다윗은 그만큼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감행한 블레셋 망명 같지만, 그로서는 많은 계산을 하고 결단을 내린 것이다. 아기스는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다윗의 자기의 수하에 있는 이상 이스라엘은 식은 죽 먹기처럼 쉽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다윗이 다른 네 블레셋 도시의 방백들에게로 가지 않고 자기에게 온 것이 너무나 감사하였을 것이다.

다윗은 앞 장에서 사울과 대화할 때,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쫓아다니는 것은 사울로 하여금 그렇게 하는 사람들 때문일 수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이유는 그들이 다윗에게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하고 다윗을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함이라고 하였다 (삼상 26:19). 다윗은 이미 이 말을 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스라엘의 지역을 떠나서 살아야 할 것을 심각하게 계속적으로 고려하여왔던 것이다. 사울의 치하에서 도망 다니며 사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다윗이 유다 지역이라도 사울에게서 빼앗아서 스스로 왕을 선언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질문을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다윗의 성품과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사울이 살아있는 한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서 왕은 곧 사울이었다. 자신이 왕이 된다는 것은 사울이 죽고 난 이후의 문제인 것이다. 어떤 면에서 사울은 자기 아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다윗과 원수를 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식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인간을 추하게 만드는 것도 없는 것이다. 자식에 대한 집착은 곧 자신에 대한 집착이다. 자기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 자기가 이루어 놓은 것을 받게 하고자 하는 마음은 절대로 이 세상에서 영생할 수 없는 인간이 최후에 갖는 소망이 되기 때문이다.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각기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 되었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남자 장정만 600여 명이었다. 그들의 거의 모두는 가족을 거느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최소한 약 2500-3000여 명의 인원이 될 것이다. 인력은 곧 병력인 시대에 가드에 이만한 인원이 새로이 들어왔을 때, 아기스는 입이 딱 벌어졌을 것이다. 일단 다윗은 가드에서 아기스와 함께 불안정한 동거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말대로 이방 세계에서 하나님의 전을 찾지 못하는 곳에서 살게 된 것이다. 이때의 다윗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하였을까? 얼마나 하나님의 전이 그리웠을까? 얼마나 소시 적이 그리웠을까? 얼마나 부모님이 보고 싶었을까? 아마 이 시점에 다윗의 부모는 요단강 건너 동편의 모압에 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다윗과 부모는 동서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점이 다윗을 더욱 힘들게 하였을 것이다.

4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일차적으로 다윗이 가드로 망명한 효과는 곧 이루어졌다. 사울이 다윗의 망명 사실을 알게 되었고, 더 이상 다윗을 잡으려고 쫓아다니지 않게 된 것이다. 사울의 입장에서 다윗을 잡겠다고 블레셋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힘이 있거나,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서 다윗을 돌려받거나, 다윗의 부모를 인질로 잡아서 다윗을 돌아오도록 할 정도로 여력이나 여유가 없었다. 사울은 일단 자기가 쫓아다니며 잡아야 할 다윗이 없어진 것으로 오히려 속이 시원해지고, 일단은 다윗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5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께 은혜를 받았거든
                지방 성읍 중 한 곳을 주어
                나로 거하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거하리이까
다윗은 블레셋에 망명하고 아기스가 다윗을 다윗이 보기를 원하는 대로 보도록 한 후에 이차적인 계획을 세운다. 그것은 아기스와 가능한 한 떨어져서 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다윗은 영적으로 블레셋과 맞지 않았다. 또 자기의 마음을 계속적으로 숨기고 사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기스와 떨어져서 사는 것이 여러모로 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표현하는 다윗의 방법은 너무나도 부드럽다. 먼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거든”이라고 말한다. 영어로 “favor”이라는 말은 매우 쓸모 있는 말이다. 실제로 아기스는 다윗에게 은혜를 입혀주었다. 아기스에게 볼 때에 다윗은 호박이 덩굴째 굴러 들어온 것이다. 말 그대로 복덩이이다. 그러나 다윗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철저하게 아기스를 이용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지방 성읍 중의 한 곳을 주어 나로 거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아기스와 떨어져 살고 싶다는 것이다.

만일 이 시점에서라도 아기스가 다윗의 속마음을 간파하였다면 다윗은 즉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기스는 결코 다윗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기스는 욕심은 있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자기가 결코 다윗을 가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어야 하는데, 그에는 그런 것을 보는 혜안이 없었다. 우리도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질 때, 그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복이 되지 않고 화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전에 임종섭 집사님이 로또 복권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처럼, 거의 모든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액수의 복권에 당첨되면 곧 그들의 삶의 페이스를 잃고 거의 폐인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기스는 자신이 이미 한 도시의 방백이었으므로 다윗 같은 젊고 패기 있는 장수를 자신의 수하에 둔다면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고 흐뭇한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기스에게 충신이 있었다면 아마도 다윗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을 수 있었을 것이지만, 아기스에게 불행한 사실이 있다면 그런 충신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아기스의 귀에 그들이 말이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의외로 자기가 들으려고 하는 사실만 듣고, 자기가 보려고 하는 사실만 보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제 결정적으로 아기스에게 맘에 쏙 드는 이야기를 한다.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거하리이까?” 듣기에 따라서는 “당신을 떠나서 먼 곳에서, 먼 지방에서 나도 왕처럼 그렇게 살렵니다.”라는 말로 들릴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아기스는 다윗을 철저하게 신뢰하였기 때문에 다윗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기스의 마음에는 다윗이 너무나 겸손하고, 신하로서의 갖추어야 할 태도를 갖추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순결한 동시에 지혜로워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다윗은 순결한 동시에 지혜로웠다. 그래서 그는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다윗의 생애 동안에 그가 누구에게 어리석게 속은 것을 볼 수 없다. 그만큼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6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아기스는 다윗이 원하는 대로 다윗에게 시글락이라는 지방 성읍을 하나 주었다. 시글락은 유다 지방의 남쪽에 거하는 성으로서, 그 당시에는 가드의 통치권 아래 속하였었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시글락을 줌으로써, 다윗을 자신의 영원한 봉신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7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거한 날 수는
        일년 넉 달이었더라
이제 다윗은 비록 하나의 성읍이지만, 그 성읍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하는 위치가 되었다. 어떤 면에서 굴이나, 들이나, 산이나,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면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잘 곳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을 벗은 것이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을 얼마나 감사하게 여겼을 것인가는 쉽게 짐작이 갈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은 그의 수하의 사람들과 시글락을 중심으로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인 1년 4개월을 살았다. 다윗은 아마도 사울이 어떤 방법으로든 간에 죽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의 손으로 사울을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이방에 살면서도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다윗은 또한 사울이 죽으면 자기가 어떤 방식으로 왕이 될 것인지에 대하여서도 특별한 자신으로서의 시나리오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하루, 하루 하나님과 교제하며 열과 성을 다하여 살았을 것이다.

8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거민이라
그러나 다윗은 놀지만은 않았다. 천부적인 싸움꾼이었던 다윗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인력과 위치와 지정학적 이점을 이용하여서 이전부터 유다의 남쪽을 노리던 반유목민, 즉 도적 떼들이나 별다름 없는 민족들을 응징하기 시작하였다. 그술과 기르스에 대하여는 우리가 잘 모르지만, 아말렉은 분명하게 안다. 그러므로 다른 두 족속들도 아말렉과 같은 성격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울의 때에 아말렉을 철저하게 응징하였는데, 어느 사이에 다시 아말렉이 무섭게 살아 올랐던 것이다. 잡초는 잠시 한 눈을 팔면 온 땅을 새파랗게 덮고 올라오게 되어 있다. 잡초는 끊임없이 뽑아 주어도 계속 올라온다. 잡초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 땅에 아무 것도 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곡식을 심어서 잡초보다 강하게 자라게 하여, 그 땅과 그 땅의 영양분을 곡식이 다 차지해야 하는 것이다.

다윗이 이민족들을 쳐서 유다 남쪽의 치안과 국방을 튼튼하게 한 것은 유다 지파의 사람들이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도록 한 것이라는 점에서 왕으로서의 덕을 미리 쌓은 아주 좋은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나발의 목장을 지켜 주던 시절은 그저 적들이 오지 못하도록 경비를 서준 정도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적들의 근거지에 가서 그 적들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이 시점의 다윗은 철저했고, 또 그만큼 무서웠다. 다윗은 겉으로는 이민족의 은혜를 입으면서 이민족에게 얹혀서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철저하게 자기 민족을 보호하고 도적들과 같은 반유목민들을 섬멸하는데 시간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그는 자기 사람들의 필요의 수요도 해결하고, 자기 사람들의 힘을 사용할 곳을 제공하고, 아기스에게 충성을 보이는 것처럼 살 수도 있었다.

9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약대와 의복을 취하고 돌아와서
        아기스에게 이르매
다윗이 이렇게 유다 남쪽의 이민족들을 토벌할 때에는 하나의 원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은 살려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 짐승과 물건들은 철저하게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기스에게로 간다. 아기스에게 취한 물건의 상당 부분을 바쳤을 것임은 쉽게 상상이 간다. 아기스는 그것을 받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을 것이다.

10        아기스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다윗이 가로되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이니이다
그 물건들을 받으며 아기스는 다윗에게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다윗은 “유다 남방,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 겐 사람의 남방”이라고 말한다. 유다는 이미 이스라엘 영토 안이고, 겐은 모세의 장인의 민족으로서 이미 유다화한 민족들이었다. 즉 이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술과 기르스와 아말렉을 침공한 것인데 오히려 아기스에게는 철저하게 반대로 말한 것이다. 여기서 “남방”이라는 것은 단지 남쪽 지방이는 의미가 아니라, “네게브”라는 초원 지대를 의미한 자연 지리의 한 용어이다. [지리에는 자연 지리와 인문 지리가 있다. 자연 지리는 자연적인 지리 그 자체이요, 인문 지리는 인간이 손을 대어서 바꾸어 놓은 지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문 지리에는 역사와 문화와 문명이 녹아 있다. ]

11        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의 행사가 이러하여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거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다윗은 절대로 아기스에게 포로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는 포로를 하나도 잡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명이라도 포로를 잡으면, 그 포로의 입을 통하여 다윗이 아기스를 속인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만큼 다윗은 철저하였다. 그러므로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란 아기스를 속이고, 철저하게 유다를 위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다윗은 철저하게 자기의 속내를 숨기고 행동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12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그는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하니라
그리하여 다윗은 철저하게 아기스를 속이는데 성공하였다. 아기스는 다윗이 유다 남부 지역을 공격하여서 자기 민족, 자기 지파의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철저하게 미움을 받았을 것이기에 다시는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다윗이 어디 갈 곳이 없고, 결국은 자신의 밑에서 봉신 노릇을 하면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아기스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는 우선 정보전에서 졌다. 정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상황이 아무리 자기 눈에 쉽게 보이더라도, 모든 정보기관이 살아 움직여야 현실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정보에 약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보라고 보여 주는 것 외에는 볼 수 있는 힘이 없다. 직관력과 통찰력과 혜안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신문이나 잡지나 인터넷 등을 통해서 이미 누가 해석해 준 것을 가지고 열을 내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기자가 말해준 것의 이면을 볼 수 있고, 사건과 사고의 이면을 볼 수 있는 힘이 너무나 부족하다. 아기스의 문제점은 오직 다윗이 말해 준 것만으로 자기의 정보의 모든 것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오늘 성경 공부를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적용해야 할까? 먼저 모든 일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또한 있는 형편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순결하면서도 또한 지혜로워야 한다. 악한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또한 지혜로워야 한다.

제 28 장

본장부터 우리는 사울의 종말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버린 사울을 하나님은 버리신다. 그리하여 사울이 하나님을 구하나,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으실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시지 않으실 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영혼의 깊은 밤을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1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 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28장은 임박한 전쟁의 분위기로 시작된다. 다섯 개의 도시 연맹으로 이루어진 블레셋은 다윗이 없는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군대 소집 명령을 내렸다. 다윗이 없는 사울은 어쩌면 종이호랑이와도 같았다. 사울도 역시 영웅이었다. 그러나 사울이 영웅이었고, 영웅이 아니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울에게 하나님과 함께 하였었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다윗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난주에 공부하였듯이 다윗은 블레셋의 다섯 방백 중의 하나인 가드의 아기스에게로 정치적인 망명을 하였다. 그리하여 다윗은 시글락이라는 지방 도시를 받아서 겉으로는 블레셋을 위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철저하게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하여 남쪽의 대적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아기스는 다윗에게 이번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여 다윗의 조국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윗의 생애에 또 다른 종류의 엄청난 위기가 닥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다윗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하나님은 어떻게 다윗을 인도하셨을까? 다윗이 블레셋으로 갔던 것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던 것일까?

2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로 영영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아기스의 이러한 명령에 겉으로는 아무런 저항감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대답한다. 아기스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아기스는 다윗을 자기의 머리를 지키는 자로 영영히 삼겠다고 대답한다. 아기스는 다윗을 자기의 최고의 충신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다. 과연 아기스의 뜻대로 될까?

3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
사무엘이 죽었다는 기사는 이미 25:1에 언급되었다.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애곡하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25:1상). 28장 3절 말씀과 근본적으로 같은 내용이다. 25장 1절에는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라는 말씀이 하반절에 있는데, 28장 1절에는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는 말씀이 하반절에 있다.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스라엘에서 축출하였었다는 이 기사는 지금까지 사울이 한 일에 대하여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인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무당이나 박수를 철저하게 배격한다. 한국에서는 무당은 주로 여자를, 박수는 주로 남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무당이나 박수는 샤머니즘의 세계에서 신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을 위하여 신과 대화하여 인간의 요구 조건을 말해 주는 존재이다.

신명기 18장 9-14절을 찾아 함께 읽어보자.
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10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12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14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
사울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철저하게 신접한 자나 무당 등을 이스라엘에서 근절시키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은 분명히 바른 모습이다. 아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내렸을 때에는 사무엘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들었던 때였을 것이다.

4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이제 전쟁이 벌어졌다. 즉 블레셋이 대대적으로 침공한 것이다. 블레셋은 수넴에 진을 쳤고, 이를 막아야 하는 사울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여 길보아에 진을 쳤다. 사울에게는 3000 명 정도의 상비군이 있었지만, 이것으로는 몇 십만 씩 몰려오는 블레셋을 대항하여 싸울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전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로 구성된 군대를 동원한 것이다.

5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문제는 5절에 나타난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 것이다. 그러면 요나단은 어떻게 되었는가? 다윗이 없을 때에도 요나단은 용맹한 장수였다. 그런데, 28장에서는 요나단도 역시 용맹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사울에게는 더욱 심한 두려움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요나단도 다윗을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으로 갔고, 요나단과의 연락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요나단은 그 마음에 얼마나 답답함을 느꼈을까?

우리도 어떠한 상황을 보고, 두려워서, 마음이 떨리는 때가 종종 있다. 그럴 수 있다. 인간이니까. 당연히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커다란 문제를 보느냐,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보느냐는 것이 핵심이다.

6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더 심각한 것은 6절에 나타난다. 사울도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께 나아갔다. 하나님께 여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셨다고 한다. 꿈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우림은 어떠한가? 우림은 둠밈과 함께 제비로 뽑는 것인데도, 사울은 우림으로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도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들을 수 없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선지자들이 그에게 아무런 말도 전하지 않은 것이다. 그에게는 그 흔한 어용 선지자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사울은 사무엘이라는 선지자와 함께하였던 체험이 있었기에 어용 선지자가 있었던들 그들의 음성을 들었을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자,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세 신비주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때를 “영혼의 깊은 밤”이라고 표현하였다. 영적인 거장일수록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없는 시기를 거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거장일수록 하나님과 가깝게 사는 날들로만 계속될 것 같지만, 의외로 하나님은 신앙의 거장을 만들 때, 이러한 영혼의 깊은 밤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매일 경건의 시간을 갖고, 설교를 듣고, 기도를 하고, 영적인 친구들과 대화를 하고, 교제를 하여도, 마음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이 새롭게 들리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그저 글자요, 혹시 내용을 알게 되어도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이기에 새롭게 들리지 않는다. 예배를 드려도 그저 예배에 참여한 것이지, 아무런 영적인 감동이 없다. 기도를 하여도 혼자 허공에 이야기하고, 중언부언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어떠한 확신도 가질 수 없다. 교회에 나와서, 혹은 성도들과 교제를 하여도 인간적인 교제요, 세상적인 대화를 끝나지, 영혼의 갈증을 채워줄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안에 영적인 생명이 있기에 그 생명은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다. 그리하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거듭난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허락하시는 것일까?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죄의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혹은 아는 사이에 죄를 범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며, 결과적으로는 영혼의 밤에 들어가게 되고, 더 깊은 밤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우리에게 밤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둘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비록 회개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갈급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필요한지 체험하도로 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훈련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계신다. 여기에 지금 (Here and now) 계신다. 다만 그분은 일부러 우리에게 당신을 숨기시는 때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분을 더욱 의지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기를 원하신다. 애인이 눈앞에 없을 때, 기회는 이때다 하고, 새로운 사람을 찾아볼까 궁리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애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을 바람을 피우는 사람에 불과하다. 애인과 떨어져 있을 때에도 그 사람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만날 순간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하나님은 때로는 그러한 사랑의 훈련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울의 경우는 이 경우보다 더욱 심각하였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원하셨던 것은 순종이다.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심판을 하셨다. 그러나 사울은 계속되는 기회를 회개의 순간으로 사용하지 않고 결국 하나님을 대항하여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 사울의 경우는 하나님을 버린 사울에 대한 철저한 심판이었다. 문제는 사울이 한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그로 인하여 사울뿐이 아닌 온 이스라엘이 고통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의 책임인 것이다.

7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이 상황에서 사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블레셋은 지금 침공해 들어와서 코앞에 있는데,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참고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울이 가장 급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전쟁의 결과가 알고 싶었다. 이 전쟁에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실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는 들어야 하겠는데,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준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사무엘이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미 죽어서 장사지내었다. 사무엘이 있으면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울은 엉뚱한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 죽은 영혼을 불러올리는 초혼자가 있다면 초혼자를 통하여 사무엘을 불러올릴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사울이 생각한 것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일까? 사울은 지금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울의 생애의 가장 큰 문제는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생각대로 사는 사람이다. 변명거리는 항상 있다.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되는 일들이다. 아말렉 때에도 그렇고, 다윗과의 관계도 그렇다.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사울이 행한 일들이 이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울은 자기의 생각대로 살아야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고 하였을 때에는 회개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대로 돌이켰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자, 하나님이 제일 금하시는 방법 즉 초혼자를 통하여 죽은 영혼을 불러내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는 사람이 자기의 긴급한 상황을 핑계하여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방법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들으려고 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방법일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는 사울의 명령에 사울의 제자들은 아무도 사울을 제지하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까운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다고 알려준다. 사울의 신하들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사울의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수 있는 수족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스텝들은 리더의 명령에 무조

특별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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