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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파노라마 제 22 강 (3/29/06)
제 4-18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6)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사울의 통치 말기와 다윗의 방황기에 관한 부분으로 사무엘상 19, 20, 21, 22, 23장을 이룬다.

제 19 장
1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2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3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 하고
처음에는 자기가 창을 던져서 다윗을 죽이려했고, 다음에는 블레셋 사람과의 전쟁을 통하여 다윗을 죽이게 하려고 하였고, 또 다시 미갈을 걸고 블레셋 사람의 양피 100을 구해오라고 하여 다윗을 죽이려 하는 등, 사울은 자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다윗을 죽이기에 전력투구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이 실패하자, 사울은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다윗을 평생의 원수로 삼는다.

그리하여 이제 사울은 급기야 자기 아들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자기의 명이 서질 않는다. 엄밀하게 말해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려도 그 영이 즉각적으로 이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선 요나단은 즉각적으로 다윗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다.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시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은 사이다. 요나단은 이 언약에 평생을 충실하였다. 그러므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고, 자기에게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듣자마자 다윗에게 오히려 그 모든 사실을 알려서 그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요나단은 왕이요 아버지인 사울의 명령을 듣기 보다는, 양심의 소리와 하나님의 음성과 다윗과의 언약을 따라 행동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내가 요나단이고, 내가 왕이신 내 아버지 사울의 명을 따라 어떤 방식으로라도 다윗을 죽이면 내가 왕이 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나는 어떻게 할까? 과연 내가 내 욕심을 물리치고,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윗을 살리려고 하는 쪽에 적극적으로 설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투명해야 한다. 내가 죽고 네가 살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이다. 십자가의 정신은 내가 죽음으로 네가 살아나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 모든 사람들이 살아난 것이다. 요나단은 자신이 죽고, 다윗이 살도록 하려고 하였다. 요나단은 자신이 왕이 되지 않고, 다윗이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십자가의 정신이 내가 죽는 것이라고 하였기에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하기가 쉽고, 먼 일처럼 느껴지기가 쉽다. 그러나 십자가의 삶은 매일 일어나는 삶이다.

빌립보서 2:1-4절까지의 말씀 중에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에 대한 예로 5-11절까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으로 바울이 예를 들은 것이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사람이 되시고, 종이 되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땅에 묻히시고, 음부에 내려가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셨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우리 보통 사람보다 더 낮아지셔서 종이 되시고, 죽으시고, 음부로 가신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분을 높이셔서 모든 무릎을 예수님께 꿇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이 있다고 하지만, 이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내 옆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 하나 다 나보다 더 낫게 여겨지지 않으면, 나는 사실 절대로 영적으로 성숙한 것이 아니다. 속지 말자. 섬김의 삶, 화해의 삶을 살지 않으면 결코 영적으로 성숙한 것이 아니다.

요나단은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고 말하였다. 즉 요나단은 “자기의 밭이나 들이 있는 곳으로 사울 왕을 모시고 나간다. 그리고 그곳에 서서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사울의 의향이 정확하게 드러나면 곧바로 다윗에게 알린다.”는 계획을 다윗에게 말해 준 것이다. 그러면 요나단이 다윗과 짜고 있다는 사실이 사울에게 알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나단은 정말로 뱀같이 지혜롭게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4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5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포장이라는 것은 곧 장점을 들어서 말하는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아서 그것을 말해 주어야 한다. 요나단은 다윗의 장점을 설명하면서 사울의 신앙, 이성, 감성에 호소한다. 우선 사울이 다윗을 죽이는 것은 범죄라고 선언한다. 다윗이 사울에게 죄를 범한 일이 없고,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선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해 준다. 그러면서 다윗이 행한 일을 다시 사울에게 기억하게 해준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을 죽였고, 그 일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고, 그로 인하여 사울이 기뻐하였는데, 지금 왜 무고하게 그 다윗을 피를 흘려 범죄하려고 하느냐고 호소했다. 요나단의 호소는 간고하면서도, 직선적이었다. 사울로 하여금 사실을 바라보도록 하였다. 사울에게 이러한 호소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요나단뿐이었는데, 요나단은 그의 역할을 한 것이다. 다시 한번 요나단의 훌륭한 점을 보게 된다.

6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사울은 요나단의 말을 듣고 즉각적으로 맹세한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여호와께서 사시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다윗도 결코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이다. 사울은 요나단의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아,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울의 이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다만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의 생각과 계획과 기도와 분투는 결코 없어지지 않고, 그의 평생을 사로잡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요나단 앞에서 한 맹세대로 다윗은 결코 죽임을 당치 아니하였던 것이다. 이 말은 마치 독자들에게는 “내가 비록 다윗을 죽이려고 해도, 다윗은 결코 죽임을 당치 아니할 것이다. 내가 비록 다윗을 죽이려고 해도, 나의 계획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로 들린다. 그러면 사울의 삶은 무엇인가? 그의 일생은 무엇인가? 자기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자기가 죽이지도 못할 다윗을 죽이려고 자기 일생을 다 바치는 그의 일생은 무엇인가?

우리가 추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일생을 바치는 목적이 바로 이런 삶이 아닐까 돌아보도록 하자. 이 세상에 영원한 것 외에는 진정한 가치가 없는데, 영원한 존재는 무엇일까?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그분의 말씀이 영원하시고, 그분이 지으신 인간이 영원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을 영원한 인간들에게 전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다. 그 나머지 삶은 진정한 목적이 아니고, 다 방편이다. 인류를 이롭게 하는 모든 연구와 분투도 알고 보면 영원하신 하나님을 영화로우시게 하려는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고전 10:31)고 한 말씀은 우리의 삶에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다 적용되어야 하는 말씀인 것이다. 이 잣대로 우리의 모든 것을 재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순간적으로 우리의 마음의 욕심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지만,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내가 지금 하는 이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돌이켜 보아야 하는 것이다.

7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알게 하고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
이제 요나단은 다윗을 불러 만난다. 그리고 자기와 사울과의 대화를 다 전해준다. 그리고 그를 사울 앞으로 인도한다. 그리하여 다윗이 사울 앞에서 다시 사울을 섬길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이 바로 화평을 심는 사람, 화해를 심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화해와 화평의 사람은 사람들을 서로 화목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분열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분열과 싸움과 분쟁이 있다. 내가 어떤 역할을 하는 지 돌이켜 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작은 것의 사실을 규명하려다가 큰 것을 놓친다.

이름하여 소탐대실 (小貪大失)이다. 무엇이 소이고 무엇이 대인가? 소는 작은 사실을 규명하여 자기가 옳다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요, 대는 그로 인하여서 상대방을 잃고, 공동체에서 자기의 위신을 세우려고 하지만 잃고, 공동체가 깨어지고, 공동체가 불안해지고, 나중에 나가서는 자기 주변에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싸우고자 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중요한 것처럼 보여서 공동체의 하나 됨을 깨뜨리려고 하는 악한 자의 꾐에 넘어가는 것인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보통은 자기의 이상을 주장하려다가 공동체의 분열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마 5:9)라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팔복의 일곱 번째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금과옥조 (金科玉條)로 삼아야 하는 말씀인 것이다. 나는 화평을 이루는 사람인가? 분열을 이루는 사람인가?

8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매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니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이 일어났고, 다윗이 그 전쟁에 파견되어 블레셋 사람들과 싸웠다. 다윗은 그들을 크게 쳐부수었고, 그리하여 블레셋을 물리쳤다. 다윗이 다시 승리하고, 다시 성공하였다. 이것이 사울을 다시 괴롭혔다. 아마 사울은 전쟁이 날 때마다 다윗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윗은 백전백승 (百戰百勝)이었다. 싸우기만 하면 이겼다. 사울은 다윗을 라이벌로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이다. 우리 앞에 있는 그 사람이 라이벌인가? 아니면 동역자인가?

1823년 눈보라치는 밤, 오스트리아에서 한 노인이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수용소에 수감된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는 황제 요세프 2세의 궁정 음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르 (Antonio Salieri)였다. 살리에르는 우연한 기회에 젊은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의 공연을 보고, 그의 천재성에 감탄한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오만하고 방탕한 생활을 보면서 그런 그에게 천재성을 부여한 하나님을 저주하고 그를 증오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영화 아마데우스의 시작 부분이다. 이 영화로 감독 밀리쉬 포먼은 1985년에 아카데미에서 무려 여섯 개의 상을 타게 되었다. 천재성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한 사람의 삶을 천재의 삶과 대비하여 그린 한 천재 영화감독이 다시 아카데미상을 휩쓴 것이다.

그런 그를 보고 다시 질투와 시기로 가득해진 사람이 얼마나 또 있었을까? 이와 같이 세상은 잘 나가는 사람이 있고, 그런 잘 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질투하고, 또 질투하면서 “너는 왜 저렇게 하지 못하느냐?”며 자신과 주변 사람을 괴롭히며 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만약 살리에르가 자기의 삶을 살았다면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차르트에 대한 시기의 화신에 사로잡혀서 그의 일생을 망친 것이다. 우리도 우리 앞에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

9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10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자, 사울에게 또 다시 병이 도졌다. 하나님 앞에서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했지만, 사울은 그렇지 않았다. 사울은 집에서도 단창을 손에 잡고 있었다. 그는 언제부터인지 피해망상에 사로 잡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왕인데, 그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지켜줄 텐데 왜 그의 손에 단창이 필요하단 말인가. 아니면 기회를 봐서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으로 늘 손에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버릇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두 경우 다일 수도 있다. 시기심 가득한 사울에게 다시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접하였고, 그 순간에 다윗은 손으로 사울을 위하여 수금을 타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다시 사울은 다윗을 그의 단창으로 벽에 박으려고 다윗에게 그의 단창을 던졌다. 창은 벽에 박혔는데, 창과 벽 사이에 다윗이 박히지 않고, 다윗만은 사울에게서 빠져 나갔다. 다시 사울은 다윗을 놓친 것이다. 다윗은 그 밤에 사울로부터 도피하였다. 사울이나 살리에르가 겪은 고통을 의학적으로 말하면 바로 우울증이다. 우울증이 그렇게 무서운 병임을 알아야 한다.

11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일러 가로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사울은 다윗이 자기의 집, 즉 사울의 딸 미갈과 함께 사는 다윗의 신혼살림 집으로 도망하였을 것을 알고, 사자들을 자기의 딸의 집으로 보내었다. 그리고 사자들에게 그의 집을 밤새어 지키라고 하였다. 밤사이에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아침이 되면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런 명령을 받은 신하들은 마음이 어떠하였을까?

그러나 다윗의 아내 미갈은 아버지 사울의 편이 아니라, 다윗의 편이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람을 붙여 주시고, 돈도 붙여 주시고, 환경도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때로는 나를 훈련시키시고, 징계하시기도 하지만, 나를 향하신 궁극적인 의도는 선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미갈은 다윗에게 “오늘 밤에 우리 집을 떠나서 도망하라”고 알려준다. 아마 여인의 직감으로 집을 둘러싼 살기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피곤한 다윗은 그 밤에 아내 곁에서 잠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갈은 자기 곁에 있는 남편을 물리치며 그에게 살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미갈의 남편 다윗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다윗의 시편 59편은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다. 아마 다윗이 이런 일을 당하고 얼마 후에 쓴 시일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회상한다.
1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2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3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하오니
4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
이 기도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도왔는지 보도록 하자.

12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우매
        그가 도망하여 피하니라
13        미갈이 우상을 취하여 침상에 뉘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
미갈은 이미 문에는 사울이 보낸 사자들이 지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급히 다윗을 창으로 달아 내려주었다. 아마 미갈의 집은 성 벽 위에 지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다윗을 잡으려는 사울의 사자들은 성 벽 밖을 지키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도망하게 되었다. 뒤에 읽어 보면 알겠지만 다윗은 그 길로 사무엘 선지자를 찾아 라마의 나욧으로 갔다. 미갈은 이제 시간을 벌어야 함을 알았다. 마치 여호수아가 보낸 두 첩자들을 기생 라합이 자기 집 지붕에 숨기고, 그를 추격하는 사람들을 멀리 따돌려서 다른 길로 가게 하였듯이 (수 2:4-7), 미갈도 다윗을 잡으러 가는 사람들로부터 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게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미갈은 먼저 다윗의 침상에 다윗이 그대로 누워서 자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우상을 먼저 취하여 침상에 누였다. 이 우상은 사람 모양을 한 드라빔 (teraphim: 사람의 형태로 된 가정 수호신) 우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염소 털로 엮은 것으로 그 머리를 씌워서 마치 다윗의 머리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사람이 입는 옷으로 그 우상을 덮었다. 즉, 이스라엘에서는 이불과 겉옷이 같은 용도로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얼핏 보면 다윗이 침상에 누워서 자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14        사울이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려 하매
        미갈이 가로되
                그가 병들었느니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아마 아침이 되었는지 모른다. 사울이 다시 자기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때 미갈은 그를 잡으러 온 사자들에게 “다윗이 병들었다. 그래서 다윗이 직접 나와서 맞을 수가 없다. 그러니 다윗이 몸이 좋아지거든 다시 오라.”라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그래서 사자들은 다시 사울에게로 돌아갔다. 아마 그 시대에는 사람이 병이 들었으면 체포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사자들은 다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여기서 또 얼마만큼의 시간을 벌었다. 미갈은 다윗을 사랑하는 만큼 또한 지혜로웠다.

15        사울이 또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을 보라’ 하며
        이르되
                그를 침상 채 내게로 가져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
16        사자들이 들어가 본즉 침상에 우상이 있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었더라
사울은 자기에게 돌아온 사자들에게 아마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너희들이 직접 다윗을 보았느냐? 가서 직접 다윗이 아파서 침상에 누워 있는 지 너희들의 눈으로 똑똑히 보고 오라.” 그리고 말하기를 “그가 침상에 누워 있으면 그를 침상 채 내게로 가져오라. 아파서 도망하지 못한다고 하니 너희들이 그를 죽이기가 두려우면 내가 직접 그를 죽이리라”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사자들이 미갈의 집으로 가서 들어가 방에 가서 보니 침상에 우상이 있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즉 다윗이 아파서 침상에 누워있다는 것이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미갈의 목적은 거짓말이 드러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지로 다윗이 사울의 손을 피하여서 멀리 도망가게 하는 것이었다. 사자들은 결국 그가 속은 것을 알았다. 사자들이 증거로 그 침상을 그대로 사울에게 들고 갔는지, 아니면 그러한 사실을 사울에게 고하였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나는 옛날부터 이 장면을 연상하기를 마치 사자들이 다윗이 침상에 누워 있는 줄로 알고 침대를 들고 황급하게 사울에게 가는 모습을 그렸었다. 성경을 자세히 보지 않고, 사울이 명령한 것과 미갈이 해 놓은 것을 대충 섞어서 그런 상상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사자들의 미갈의 집에 들어가서야 속은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런 침상 채로 사울에게 가지고 갔을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다.

17        사울이 미갈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
사울이 미갈의 집으로 갔는지, 아니면 미갈이 사울 왕 앞에 부름을 받아 나갔는지는 모른다.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사울은 미갈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라고 물었다. 다윗이 미갈에게는 남편이지만 사울에게는 대적이라는 것이다. 사위가 곧 대적이라는 것이다. 질투와 시기의 신이 얼마나 무서운가? 그러나 미갈은 또한 할 말이 있었다. 미갈의 이러한 말은 일종의 선의의 거짓말 (white lie)라고 할 수 있다. 즉 다윗이 말하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즉, 미갈은 아버지 사울의 마음과 생각에 철저하게 동의하여 다윗을 붙잡아 두려고 하였지만, 다윗이 자기를 죽이고 도망하려고 하여서 결국 놓아 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속인 것이 나의 진심이 아닙니다.”라고 변명하는 것이다. 전후 정황을 잘 살펴보면 이러한 미갈의 말도 거짓말임이 분명하게 드러나겠지만, 사울의 입장에서는 미갈을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이 선에서 다시 다윗을 향하여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미갈의 행동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해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 10:16). 미갈은 뱀같이 지혜로웠는가? 그렇다. 그러면 비둘기같이 순결하였는가? 조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에 주님께서 해 주신 이 말씀으로 지혜와 순결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고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거하였더라
다윗은 사무엘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16:13). 그때는 아마 12-13세 정도의 어린 다윗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에 다윗은 사울에게 악신이 임했을 때 수금을 연주하여 그를 고쳐주며, 그의 병기든 자가 되어 그의 생명을 지켜 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버지 이새의 양 떼를 치는 목동의 역할도 감당했다. 결정적으로 다윗이 전국적인 영웅이 된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터에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다가 골리앗을 죽이는 사건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자기의 라이벌로 생각하고, 다윗을 죽이는 것을 자기 생애의 최고 목표로 삼고 모든 것을 투자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장남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어 생명처럼 사랑하는 친구 사이가 되었으며, 차녀 미갈은 다윗을 사랑하여 다윗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 사이 다윗은 모든 전쟁에서 백전백승하면서 확고한 지도력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 이때쯤에 다윗은 약관 20세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 그는 공식적으로 단 한 번도 사무엘을 만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사울이 그를 집요하게 죽이려 하였고, 이제는 사무엘과의 교제를 통하여 새로운 힘을 부여받아야 할 것이 절실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사울의 베냐민 기브아에서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라마로 올라가 사무엘에게 나아가게 되었다. 다윗은 그의 도피를 단지 생명을 지키려는 도피로만 삼지 아니하고, 그 기회에 영적인 최고봉 리더를 만나서 영적인 힘도 또한 얻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라마는 사무엘상 1:1에 나오는 “라마다임소빔”의 준말로 “소빔 사람의 쌍 언덕”이라는 말이다. 즉 “라마”는 “언덕”이라는 의미를 가진 지명이다. 이곳은 사무엘은 아버지인 엘가나의 고향이고, 사무엘이 태어난 곳이고, 장성한 사무엘이 거하면서 이스라엘을 통치한 곳이다.

돌이켜 보면, 사무엘은 다윗의 인생의 방향을 영원히 돌려놓은 스승이자, 멘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다윗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그를 가르치고, 상담하며, 일의 모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가 다윗을 기름 부을 때, 임하신 하나님의 신에게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다윗은 힘들지만, 그의 역할을 잘 감당해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는 사무엘을 만나는 것이 나무나 절실하였던 것이다. 다윗은 사무엘을 만났을 때, 얼마나 그에게 기쁨이 넘쳤을까? 다윗을 본 사무엘의 마음이 또한 얼마나 흐믓하였을까? 둘은 재회의 기쁨을 나눈 후, 대화를 나누었고, 다윗은 사무엘에게 사울이 행한 모든 것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아마 사무엘은 이미 그러한 일을 다 알거나 최소한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무엘에게 다윗이 자기가 겪은 사울에 대하여 고하는 것 자체가 다윗에게는 큰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사무엘은 다윗을 데리고 나욧으로 갔다. 나욧 ((tywIn)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주거 (住居)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이 한 지명인지, 아니면 사무엘이 인도하던 선지자들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단어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 나욧이라는 의미 자체가 선지자들이 공동 주거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공동체를 의미하는 단어일 것이다. 그곳에는 사무엘이 인도하는 선지자 공동체가 있었다. 다윗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무엘의 문하생들이 있는 곳에서 함께 교제할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마치 적지와도 같은 살벌한 사울의 궁정에서, 혹은 블레셋과의 전쟁터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이제 나욧에서 선지들과 함께 거할 때, 다윗은 얼마나 많은 평안과 능력과 충만함을 체험하였을까?

우리에게 이렇게 돌아갈 곳과 돌아갈 사람과 함께 영적인 교제를 나눌 대상이 있는가? 우리 교회가 나에게 이러한 존재인가? 아니면 우리 교회가 나에게 사울의 궁정과 같고, 블레셋과의 전쟁터 같은가? 이곳에 거하면서 늘 다른 곳을 꿈꾸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곳에 살면서 현재 나에게 주신 교회와 나에게 주신 영적인 리더를 인정하며 살아야 하는가? 이곳에 적응하는 것은 영적으로 낮은 것이고, 늘 새로운 곳을 꿈꾸는 것은 영적으로 고상한 것인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현재 여기서 승리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 생활 부적응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현재의 생활이 너무나 힘들다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어떠한 방법으로든 나에게 영적인 힘을 공급해 주는 대상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내가 속한 교회가 나의 영적인 힘을 공급 받는 곳이 아닐 때는 신앙생활에 많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기에서 다윗과 요나단, 다윗과 미갈, 다윗과 사무엘과 같은 관계를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제 시대가 점점 더 지구촌 시대가 되고 있으므로, 공간을 떠나서 교제하는 것도 일반화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은 다윗이 요나단과 미갈이 있었고, 멀리 사무엘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여기에나 저기에나 다 우리에게 영적인 힘을 주는 분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19        혹이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그런데 여기에 사울에게 정보를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울은 현재 정권을 잡은 왕이기에 그를 위하여 충성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후에 다윗이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도망하여 진설병을 얻어먹고, 골리앗의 칼을 얻은 사실을 사울의 신하 에돔 사람 도엑이 보고 사울에게 고하여 제사장 85인을 죽인 일이 있었던 것처럼, 악한 자에게 함께하는 악한 자들이 꼭 있게 마련이다. 잠언 16:4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잠 16:4). 악한 일에 쓰임을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의의 병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자들의 발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소식을 전할 것이 너무나 많은데, 악한 소식을 전하는데 사용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사울은 다윗의 소재가 파악되자마자 자기의 사자들을 보냈다. 그들은 곧 바로 라마로 올라갔고, 결국 나욧까지 갔다. 그러나 그 사자들이 선지자 무리들이 예언을 하는 것을 보고, 사무엘이 그들의 중심인물로 선 것을 보자마자, 하나님의 신이 그들에게 임하셨다. 그들은 곧바로 활홀경에 들어갔고, 예언을 하게 되었다.

사울의 사자들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은 사울이었고, 명령의 내용은 다윗을 잡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신의 명령을 받게 되었고, 그들은 다윗을 잡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활홀경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사울이 모든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었다.

이것을 다른 시각에서 보면 사무엘의 영향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무엘은 악한 목적을 가지고 온 사람들을 꺾을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그러한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우리의 공동체가 악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교회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악한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또한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21        혹이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른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 고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결국 첫 번째 보냄을 받은 사자들은 사울에게 빈손으로 돌아갔다. 다윗에게는 손도 대지 못하고, 사무엘과 그의 선지자들만 보고 영적인 체험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리하여 사울은 다른 사자들을 보내었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세 번째 사자들을 보내었고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그러자 급기야 사울이 라마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생각하기를 “나는 사무엘을 보아도, 내 정신을 차릴 수 있고, 다윗을 잡아 올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라마에 갔다. 세구라는 곳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그것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옛날에는 우물의 정보 수집처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인터넷이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사울왕이 물어보았을 때,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그가 보내었던 세 차례의 사자들이 다 다윗을 잡지 못하였던 것을 라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번도 그 결과가 동일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라마에 있는 나욧에 있습니다.”라고 정확하게 말해주었던 것이다. 사무엘과 다윗은 사울이 온다고 해도 조금도 위치를 변경하거나 사울이 오는 것을 막거나 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사울은 이제 나욧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울의 경우는 나욧에 도착하기 이전이 이미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했다. 그래서 그는 나욧으로 가는 중에 이미 영적인 황홀경에 빠져서 예언을 하게 되었다. 그만큼 하나님은 사울로 하여금 그의 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만큼 다윗을 사울의 손에 잡히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것이다.

24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사울은 이제 나욧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사울이 옷을 벗는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갔다면 아마 동행도 있었을 것이고, 본인도 무장을 하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옷을 벗었다는 것은 다윗을 해할 수 있는 어떠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벌거벗었을 뿐만 아니라, 종일 종야를 누워있었다. 죽은 것은 아니지만 어떠한 악을 행하거나 어떠한 위험을 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항복한 자세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들과 같은 모습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선지자가 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울은 다윗의 얼굴도 보지 못하였다. 다윗은 사울의 그러한 상태에 있는 것을 보고 여유 있게 피신하였을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저항하며 어떤 악을 행하려고 할 때에 사울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을 체험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하나님이 막으시지 않으시고, 그냥 내버려 두신다. 그러면 그것이 악인지도 모르고 악을 행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우리가 죄를 행하려고 할 때, 죄를 행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울의 경우, 물론 다윗을 지키시기 위하여 사울을 막으셨지만, 그래도 그 자체가 사울에게 엄청난 은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울은 이때에 돌이키려고 하면 돌이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은혜 체험을 하고도 전혀 돌이키지 못하였다. 그로 인하여 자기의 인생이 철저하게 망가져 가고 있음에도 돌이킬 능력을 점점 더 상실하게 되었다.

제 20 장
1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와서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부친 앞에서 나의 죄가 무엇이관대
                        그가 내 생명을 찾느뇨
2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다윗은 언제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였을까? 여기에서 “도망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사울이 사무엘과 선지자 무리의 앞에 있을 때, 다윗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므로 아마 다윗은 사울이 나욧에서 벌거벗고 종일 종야를 누워 있을 때를 이용하여 도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사울을 피하여 요나단에게로 도망한 것이다 (삼상 19:23-24 참조).

요나단을 만난 다윗은 어느 정도로 격앙된 어조로 항의성 발언을 한다.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기에 사울 왕이 나를 그렇게 죽이려고 하시느냐?”는 것이다. 다윗으로서는 당연히 할 말을 한 것이었다. 묵묵히 참고만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대화가 필요하였고, 요나단으로부터 사랑과 우정으로 가득한 격려와 협조를 받아야할 입장에 놓여 있었다. 때로는 꾹 참아야 하는 것이 미덕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서 격려를 받아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잘 버틴다고 그냥 두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미리 예방하는 차원에서 서로 돌아보는 것이 좋다. 이런 면에서 목장에서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내년도에도 목장 사역을 통하여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는 분위기가 진작 되어야 할 것이다.

다윗의 항의 혹은 투정에 요나단은 먼저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힘주어 두 번이나 말한다. 사울 왕이 모든 크고 작은 일을 할 때에 자신과 상의하므로, 만일 사울이 다윗을 죽일 계획이 있다면 자기가 중간에 서서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기원전 54 년경에 로마 삼두정치의 일인이었던 크라수스가 로마의 7개 군단 5만 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파르티아 왕국을 침략했을 때, 파르티아에서는 수레나스라는 젊은이를 총사령관으로 지명하였다. 크라수스라는 골리앗을 수레나스라는 다윗이 막아야 하는 그런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는 오직 만여 명의 기병만을 데리고 크라수스를 공략했다. 그의 전략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활의 중간을 구부려서 활의 사정거리를 세 배로 늘린 것이었다. 둘째는 기병마다 낙타를 한 마리씩 배당하여 낙타 등에 무한정할 정도의 화살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이 작전으로 크라수스의 거의 7군단에 가까운 전력은 소수의 도망자를 제외하고는 크라수스를 포함하여 모두가 전멸하였다. 그런데 이 젊은 장군 수레나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승전 환영 만찬 자리에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객의 칼을 맞아 죽고 말았다. 그때가 그의 나이 불과 30세였을 때였다. 그의 인기가 너무 높아질 것을 두려워한 왕 오르데스가 그를 죽인 것이었다. 그로 인하여 그의 빛나는 전술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만일 수레나스에게 요나단과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오랜 동안 나라를 위하여 충성스럽게 일했을 것이다. 파르티아의 왕은 가장 충성스러운 공신을 시기하여 죽였던 것이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말을 듣는 입장이 되었을 때에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갈 수 있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지 않으면, 우리도 그런 필부필부(匹夫匹婦: 그저 그냥 그런 보통 사람들, 아무런 바라볼 것이 없는 사람들)가 되고 만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기에 자기가 받은 달란트와 은사에 따라서 충성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달란트와 은사를 바라보고 질시하기 보다는 내게 주신 달란트와 은사와 소명이 소중해서 그것으로 일생을 주님을 위하여 헌신 (commitment)하게 되는 것이다.

3        다윗이 또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부친이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로 이를 알게 하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다윗은 요나단의 마음을 알았다. 그러나 다윗은 염려한다. 사울이 요나단의 다윗에 대한 사랑을 알기에 사울 자신의 다윗을 죽이려는 계획을 다윗에게 감출 것이라는 것이다. 다윗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사심과 요나단의 생명으로 맹세하기를 “나와 사망 사이는 한 걸음”이라고 하였다. 그만큼 다윗은 절박하였다. 우리도 이런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때가 바로 도움이 절박한 때이다. 이때 도움을 받지 못하면 사람들은 극한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함께 있어 달라고, 그분을 위하여 깨어 있어 달라고, 내가 지금 죽을 지경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함께 있기는 하였지만, 기도를 한 것도 아니고, 두려움 가운데서 잠들어 버렸다 (마 26:36-38). 예수님도 이렇게 도움이 필요하셨다면,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을 하기를 좋아한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사람도 하나도 없고, 누구를 도와줄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사람도 하나도 없다.” 즉, 모든 사람이 도움이 필요하고, 모든 사람이 또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

4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5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 것이나
                나를 보내어 제 삼일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이에 대한 요나단의 대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소원이라고 번역되었으므로 먼 미래의 일을 이야기하는 기분이지만, 영어 NIV 번역으로 보면 훨씬 더 의미가 잘 와 닫는다. “네가 나로 하여금 하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내가 너를 위하여 하겠다.” 요나단은 다윗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기를 원했다. 그만큼 다윗을 신뢰했고, 다윗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언약의 사랑이 얼마나 강한 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에게 전달되지 않았겠는가? 마음을 대화를 통하여 전달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다시 감동시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아르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연설의 세 가지 요소를 되돌아보자.
        (1) 로고스: 말의 내용과 논리. 말이 앞뒤가 맞아야 한다. 말의 이성 혹은 지성.
        (2) 파토스: 그 말의 내용과 맞는 감성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 행복한 내용을 말할 때에는 행복한 감정으로, 슬픈 내용을 말할 때는 슬픈 어조로, 간절한 내용을 말할 때에는 간절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다. 말의 감성 혹은 열정
        (3) 에토스: 그 말의 내용에 맞는 삶과 태도. 말하는 사람의 인격, 말하는 사람의 삶의 자세에 의하여 로고스와 파토스까지 제한된다. 말은 잘하고, 감정도 좋은데, 그 말대로 절대로 살 것 같지 않아서 신뢰성이 전혀 없다면, 그 말의 가치는 곤두박질치기 쉬운 것이다. 부흥회를 나가서는 잘 설교하지만, 내 교회에서 설교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에토스에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11:1)는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삶의 자세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도하는 중에 이 말씀이 우리 교회가 내년도에 바라보아야 할 목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매사에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를 포함한 전교회가 성장하고 성숙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할 것이다.

요나단의 말에 확신을 가진 다윗은 요나단에게 사울의 마음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최소한 사울에게 가서 “저를 죽이실 계획이십니까?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십시오.”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매월 음력으로 마지막 날에 있는 잔치 자리에 일부러 빠지겠다는 계획을 말하였다. 비록 사울이 신하들과 요나단에게 다윗을 잡으라고 명령했지만, 아직 그 영을 철저하게 수행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윗은 그 잔치 자리에 자기가 마땅히 가서 왕을 섬기고 왕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그러한 상황을 말하여 준다. 다윗은 그 잔치를 하는 동안 3일간 들의 한 바위에서 숨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즉, 그 잔치 기간 동안에 다윗이 계속 보이지 않을 때, 사울의 태도를 통해서 사울의 다윗을 향한 마음을 요나단이 감지하여 그것을 다윗에게 알려 달라는 것이다. 다윗은 비둘기 같이 순결한 사람이었지만, 또한 뱀과 같이 지혜로웠던 사람이다.

6                네 부친이 만일 나를 자세히 묻거든
                그 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7                그의 말이 좋다 하면
                네 종이 평안하려니와
                그가 만일 노하면
                나를 해하려고 결심한 줄을 알지니
다윗은 일단 요나단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해 달라고 부탁한다. 사실 다윗은 사울의 왕궁 근처의 들에 숨어 있지만, 왕에게는 베들레헴의 가족의 매년제를 위하여 갔다고 말하라고 시킨 것이다. 이것은 거짓말이라기보다는 선의의 거짓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을 들은 사울의 반응이 긍정적이면 다윗을 죽일 마음이 없는 것으로, 부정적이면 다윗을 죽이려고 결심한 것으로 여기겠다는 것이다. 다윗의 이러한 방법은 매우 지혜로운 것이어서 사울의 마음을 읽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8                그런즉 원컨대 네 종에게 인자히 행하라
                네가 네 종으로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케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거든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부친에게로 데려갈 것이 무엇이뇨
다윗은 요나단과 자기가 맺었던 언약에 근거하여 그런 행동을 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요나단은 사울의 명령을 어기고 다윗의 생명을 보호하려고 하였고, 다윗은 또한 요나단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행동의 근거는 자신이 사울에게 죽임을 당할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데 있다. 그러면서 다윗은 만일 자기가 잘못이 있다면, 요나단이 자기를 직접 죽이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다윗이 이 말을 할 때, 얼마나 참담했을까? 요나단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9        요나단이 가로되
                이 일이 결코 네게 있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 결심한 줄 알면
                내가 네게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10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 부친이 혹 엄하게 네게 대답하면
                누가 그것을 내게 고하겠느냐
다시 요나단은 “이 일이 결코 네게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한다. 즉 사울이 다윗을 죽일 수 있는 일도 없거니와 요나단이 직접 다윗을 죽일 일도 없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얼마나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서로 참담한 느낌이 들었을까?

그러자 다윗은 다시 확실한 방법을 강구한다. 만일 사울이 요나단을 엄히 명령하여 다윗과 만나지 못하게 하고, 그래서 다윗에게 어떠한 정보도 주지 못하고,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할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다윗은 정말로 순결하면서도 지혜로워서, 허둥지둥 대지 않고 상황을 어떻게 하면 타개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다.

11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들로 가자 하고
        두 사람이 들로 가니라
1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증거하시거니와
                내가 내일이나 모레 이맘때에 내 부친을 살펴서
                너 다윗에게 대한 의향이 선하면
                내가 보내어 네게 알게 하지 않겠느냐
요나단은 다윗에게 확신을 주고, 그와 동역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다윗에게 “오라, 우리가 들로 가자”라고 하였다.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좀더 비밀이 보장되는 곳, 그리고 자신들의 계획을 실제로 이룬 장소로 가서 그곳에서 대화를 나누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둘은 들로 나갔다. 요나단의 다윗에 대한 도움은 이와 같이 실제적인 것이었다. 그냥 말로만 위로하는 수준이 넘어선 것이다. 그러면서 요나단은 자기가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사울에게 먼저 꺼내어서 사울의 의향을 살피겠다고 하였다. 사울의 의향을 분명하게 안 다음에 그것을 다윗에게 전달해 주겠다는 것이다. 사울이 요나단이 모르는 사이에 다윗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기 이전에 요나단이 먼저 사울의 의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겠다는 것이다. 만일 사울이 다윗을 해할 마음이 없다면, 그것을 알려 줄 것이다.

13                그러나 만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 하거늘
                내가 이 일을 네게 알게 하여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부친과 함께 하신 것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14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뿐 아니라
만일 사울이 다윗을 해할 마음이 있다면, 이제 요나단은 다윗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로 하여금 사울과 요나단 자신을 떠나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요나단은 미래를 읽는 중요한 말을 한다. 요나단은 다윗이 언젠가는 왕권을 잡을 것을 알았다. 요나단은 사울도 알고, 다윗도 알고, 사무엘도 알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알았다. 이런 그의 신앙은 단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입장이 거꾸로 될 것을 알았던 것이다. 즉 다윗이 왕권을 잡으면, 자신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비장한 말인가? 지금 요나단이 거짓된 사람이라면, 그가 다윗을 죽이고 사고를 가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라의 안정을 운운하면서 자기가 다윗을 죽인 것을 합리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단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에 하나님보다 앞서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요나단이 다윗의 기름 부음 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든지, 모르고 있었든지 간에 요나단은 다윗을 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다윗에게 자기의 생명을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앞날을 잘 바로 보는 말인가?

15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요나단은 또한 언젠가는 다윗이 사울의 집안을 포함한 모든 대적을 다 물리칠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것이 다윗이 하는 일이 아니고, 그에게 기름을 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을 다 끊으실지라도, 다윗은 요나단의 집에서 그 인자를 끊지 말라고 부탁한다. 여기서 “끊는다.”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함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정확하게 알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비록 모든 것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지만, 그가 또한 사람을 통하여 일을 하기 때문에 그 중심인물인 다윗에게 인자를 구하는 것이다. 이 요나단의 간청은 결국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다윗이 살려주는 결과를 낳게 했고, 그리하여 먼 훗날 다윗은 요나단과의 이 언약을 충실하게 지키게 되는 것이다 (삼하 9:1-13).

16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요나단의 이 말은 심지어 자기 아버지 사울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인간적인 정리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더 중시하는 요나단의 철저한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요나단의 아름다운 마음이 다시 한 번 나타나는 부분이다.

17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요나단은 다윗으로 하여금 그들의 언약에 대하여 다시 확실하게 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현재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의 마음을 강하게 하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다윗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생명을 보존해야만 하는 요나단의 후손들의 안녕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3-14)라고 하였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던 것이다. 목숨을 버리듯이 사랑하였던 것이다.

벧엘로 올라가던 야곱이 꿈을 꾸었고, 어린 요셉이 꿈을 꾸었듯이, 다윗도 사무엘이 기름을 부었을 때 비전이 생겼던 것이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하루하루의 삶을 묵묵하게, 충실하게 살아가되, 고통과 고난을 참을 수 있는 힘이 있다. 다윗은 자기에게 기름을 부으신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였기에 그 비전대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었다. 비록 지금은 사울이 자기 생명을 노리기에 도망 다녀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있었던 다윗은 하나님을 믿기에 어려움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18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네 자리가 비므로
                네가 없음을 자세히 물으실 것이라
19                너는 사흘을 있다가 빨리 내려가서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에 이르러
                에셀 바위 곁에 있으라
요나단은 다윗이 부탁한대로 행한다. 요나단과 다윗이 계획을 세운 날이 달의 마지막이었다. 내일이 곧 월삭 곧 월의 초였다. 요나단과 다윗은 다윗이 월삭 만찬에 빠지면 사울 왕이 자세하게 물어볼 것을 알았다. 요나단은 다윗의 제안과 같이 다윗에게 일단 사흘을 어떤 장소에서 있다가 사흘 째 되는 날에 에셀 바위 곁에 가서 숨으라고 한다. 여기에서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이라는 말은 19장 2절에 나오는 들을 의미하는 듯하다. 사울이 자기의 아들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공공연하게 명령하기를 다윗을 죽이라고 하였을 때, 요나단이 다윗에게 숨으라고 했던 그 들이다. 아마 이 들은 사울의 왕궁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요나단의 사유지와 같았던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20                내가 과녁을 쏘려 함 같이
                살 셋을 그 곁에 쏘고
21                아이를 보내어 가서
                        살을 찾으라 하며
                내가 짐짓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살이 네 이편에 있으니 가져오라 하거든
                너는 돌아올지니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요
이제 요나단은 다윗과 함께 어떻게 사울의 마음을 다윗에게 전달할 것인지 암호를 짠다. 요나단은 그가 다윗을 다시 보지 못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제 요나단은 다윗이 숨어있는 바위 근처로 화살을 쏠 것이고, 그러면서 그의 종자를 화살을 찾으러 보낼 것이다. 그리고 외치기를 화살이 그 소년과 요나단의 사이에 있다고 하면 그것은 사울이 다윗을 죽일 마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하였다.

22                만일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살이 네 앞 편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니라
23                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영토록 계시느니라
그러나 요나단이 그 소년에게 이르기를 화살이 그 소년보다 더 먼 곳에 있다고 외치면 그것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멀리 도망가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약정과 약조 사에는 여호와께서 그와 다윗 사이에 영영토록 계시다고 하였다.

24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So David hid in the field.
그리하여 다윗이 들에 숨었다. 처음부터 숨었는지 아니면 사흘째에 숨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추측해 보건데 다윗은 처음부터 숨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요나단과의 약속에 의해서 첫째 날부터 베들레헴으로 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울의 측에 있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사흘 동안 다윗은 먹고 자는 등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였을까? 금식을 하고, 야외에서 잤을까? 아마도 이미 다윗에게는 그의 수하가 되는 심복들이 생겼을 것이고, 그들이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을 것이다.

25        왕은 평시와 같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았고
        요나단은 섰고
        아브넬은 사울의 곁에 앉았고
        다윗의 자리는 비었으나
26        그러나 그 날에는 사울이 아무 말도 아니하였으니 이는 생각하기를
                그에게 무슨 사고가 있어서 부정한가보다
                정녕히 부정한가보다 하였음이더니
이제 월삭이 되었고, 만찬의 시간이 되었다. 사울의 궁의 큰 방에서 만찬이 열렸고, 사울은 방의 깊숙한 곳에서 벽을 등지고 앉아있었다. 영어 성경에 따르면 요나단은 사울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사울의 사촌이며 군대장관인 아브넬은 사울의 곁에 앉았다. 군대장관이므로 국방부장관이나 총사령관 정도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다윗은 사울이 사위이며, 경호실장 정도의 위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지위에 맞는 자리가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자리가 비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이 만찬을 받기에 종교적으로 부정하여서 참석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울은 다윗을 보기만 하면 죽이려고 하면서, 왜 다윗을 기다렸을까? 보면 또 잡아 죽이려고 기다렸을까? 아니면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죽이고 싶은 그런 대상이었을까? 사실 사울은 이후에도 다윗을 몇 번 더 만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다윗에게 절대로 내가 너를 죽이지 않겠다고 하였다. 애증과도 비슷한 감정일 수도 있다. 흠모와 질투가 강하게 섞여서 흠모하는 마음이 생길 때는 보고 싶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길 때는 죽이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울의 경우에 비극적인 것은 그러한 마음들이 너무나 강했고, 그러한 마음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힘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라고 할 때, 몇 몇 사람들은 그 명령을 그렇게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왕의 명령을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은 실제적이고도 당면한 위협이었다.

27        이튿날 곧 달의 제 이일에도 다윗의 자리가 오히려 비었으므로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에게 묻되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뇨
28        요나단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다윗이 내게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간청하여
29                가로되
                        청컨대 나로 가게 하라
                        우리 가족이 그 성에서 제사할 일이 있으므로
                        나의 형이 내게 오기를 명하였으니
                        내가 네게 사랑을 받거든
                        나로 가서 내 형들을 보게 하라 하였으므로
                        그가 왕의 식사 자리에 오지 아니하였나이다
둘째 날이 되어도 다윗이 보이지 않자, 사울은 요나단에게 묻는다. 왜 다윗이 어제와 오늘 만찬 자리에 보이지 않느냐고. 그러자 요나단은 사울에게 각본대로 이야기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함정 수사와 같은 세팅을 만들어 놓고서 사울의 마음을 떠보는 것이다. “다윗이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청해서 제가 허락했습니다. 다윗의 형이 다윗에게 명령하기를 집에 와서 가족의 제사에 참여하라고 했다기에 제가 가기를 허락하였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부탁보다도 더 사실적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사울에게 말하였던 것이다.

30        사울이 요나단에게 노를 발하고 그에게 이르되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울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 나왔다.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라는 말은 요나단의 어머니 즉, 사울의 아내를 두고 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질이 아주 나쁜 욕들이 어머니를 운운하는 것들이다. 미국에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의 어머니나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은 그 사람의 근본을 모욕하는 것이기에 욕으로써 발전한 것 같다. 우리가 어릴 때에도 선생님들이 “너 같은 아이를 낳고도 너희 어머니가 미역국을 먹었니?”와 같은 아주 질 나쁜 욕을 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선생님들은 좋은 예를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런 면에서는 결코 좋은 예가 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사울은 그러면서 요나단에게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하였다.”라고 말한다. 즉 이새의 아들인 다윗의 편에 섰다는 것이다. 사울은 요나단을 너무나 사랑했을 것이다. 물론 요나단도 사울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이번 문제에서 요나단은 철저하게 다윗 편에 선 것이다. 다윗을 죽이는 것은 무고하게 피를 흘리는 것임을 요나단은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울에게 있어서 요나단이 다윗의 편에 서는 것은 너무나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서 보는 것과 인간의 욕심의 쪽에서 보는 것이 정면으로 대치되는 상황이 있다. 사울도 진실하고 요나단도 진실하다. 그러나 사울은 자기의 욕심에 진실하였고,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에 진실하였다. 우리가 일생을 사울처럼 허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내 욕심이 시키는 대로 그저 진실하게 살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나의 욕심은 내 인생을 망치는 욕심이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특별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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