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ose Your Language:
한국어/Korean   영어/English

http://www.kccbr.com/data/bible_wed/wed_032206.wma성경의 파노라마 제 21 강 (3/22/06)
제 4-17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5)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사울의 통치 중기에 관한 부분으로 사무엘상 15, 16, 17, 18, 19장을 이룬다.

제 15 장
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사울은 이제 가는 곳마다 승리할 정도로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한 그 목적을 달성하는 왕이었고, 하나님도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것을 기뻐하실 터였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하실 말씀을 사무엘에게 주셨다. 그래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1) “여호와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운 분도 여호와시오, 그에게 명령을 내리시는 분도 여호와이시다. 비록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해 주시지만, 사무엘은 단지 하나님의 명령의 전달자요, 명령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2)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다. 즉 보통 사람 사울을 백성의 지도자인 왕으로 삼은 행위는 그에게 기름을 부은 것이고, 그렇게 기름을 부은 사람은 선지자 사울이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주장하신 것이다.

(3) “그 백성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사무엘과 사울의 백성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이다. 사무엘이나 사울도 역시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여 그 백성들을 다스려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운 동일한 사역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하여 세운 사역자들이다.

(4) “위에 왕을 삼으셨은즉”: 하나님은 사울을 그 분의 백성인 이스라엘 위에 왕을 삼으셨다. 왕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섬기는 존재이다.

(5)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여호와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으므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 말씀을 부정적인 것으로 돌리면,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왕으로 세우신 목적을 상실한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도록 하시었는데, 우리가 불순종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자녀로 삼으신 목적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아말렉과 관련된 것이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에 행한 것” 즉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에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추억한다.”고 하셨다. 자, 그러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아말렉이 길에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대적하였는지 출애굽기 17장으로 돌아가서 보자.
8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15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출애굽한 시기는 주전 1400년경이다. 그리고 사울이 다스리던 때는 주전 1000년경이다. 약 400년 전에 있었던 일을 이제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400년 전에 있었던 일의 실체가 무엇인가? 당시 이스라엘은 성인 남자가 약 60만, 전체는 약 200만의 민족이었다. 아무리 넓은 광야를 여행한다고 할지라도 그 길이는 상당히 길었을 것이다. 더욱이 아직 율법을 받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거의 조직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여자와 아이와 노약자는 뒤에 처지는 그런 상황이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습격한 것은 이런 상태에서 그 행렬의 후미를 공격하였다. 아말렉 족속은 양을 키우거나 농사를 짓기보다는 다른 민족을 공격해서 약탈하는 것을 전업으로 삼는 못된 족속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여행하니 아말렉에게는 너무나도 좋은 먹이 거리가 나온 것이다. 이에 모세는 여호수아를 시켜 아말렉을 대응하여 싸우라 하였고, 자신은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말렉을 물리치셨다. 그리고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두 쓸어버리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즉, 하나님이 친히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셔서, 아말렉을 모든 진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진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신명기 20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영토 안에 있는 가나안 일곱 족속은 진멸하라고 되어있고, 그 외의 지역은 성인 남자만 진멸하고, 여자와 유아들은 살려 두라고 하셨다. 신명기 20장 10-18까지 보자.
10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할 때에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11        그 성읍이 만일 평화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온 거민으로 네게 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12        만일 너와 평화하기를 싫어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남자를 다 쳐 죽이고
14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육축과 무릇 그 성중에서 네가 탈취한 모든 것은
        네 것이니 취하라
        네가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것인즉
        너는 그것을 누릴지니라
15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1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17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18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케 할까 함이니라
이스라엘이 전쟁에 나가서 모든 민족을 진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가나안에 있는 족속만 진멸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들에게 영토를 주시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가나안 민족에게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숭배를  포함한 가증한 일을 배우지 못하게 하시려고 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므로 그들이 잘못된 삶을 살 때에 그들을 심판하실 권한도 가지고 계시다.

여호수아가 실제로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동편에서 요단강을 넘어 가나안 땅으로 넘어갔을 때, 첫 번째 공격해야 할 성이 여리고 성이었다. 즉 여리고 성은 가나안 땅 첫 열매였던 것이다. 첫 열매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리고를 공격하도록 하시면서 보통의 전쟁 방법이 아닌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게 하셨는데,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매일 한 바퀴 씩 돌게 하고,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을 돌고 크게 소리를 지르게 하셨다. 이때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한 말을 잘 들어보아야 한다. 여호수아 6장 15-21절이다.
15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번 돌기는 그날 뿐이었더라
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18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21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진멸(헤렘)하는 것은 여호와께 바친다는 의미가 강하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예물, 제물, 예배, 제사, 헌금 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리고는 가나안 첫 성이요, 첫 열매였기에 온전히 바치는 것이었다. 대다수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문자적으로 순종했지만, 아간만은 불순종하였다. 그는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탐내어 취하였다” (수 7:21).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친 것을 그들이 취하면, 오히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쳐진다고 여호수아가 분명하게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간이 탐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것이다. 그리하여 애매한 이스라엘 생명들이 아이 성을 공격할 당시에 36인 정도 죽고, 결국 아간과 그 자손들이 멸망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말렉을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하신 것에는 그런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신약적인 의미에서 이 진멸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먼저 예수님의 명령 한 곳을 보고, 사도 바울의 명령을 한 곳을 보자. 마태복음 16장 24-25절이다.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진멸하라는 것을 외부에 적용하면 십자군 전쟁과 같은 일을 벌일 수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한 때에만 한정된 민족에게 특별한 언약적인 목적으로 명령하신 것을 자기들이 유리하게만 적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멸하라는 이 명령을 우리가 우리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데에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또한 날마다 자기 생명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로마서 12:1-2을 보자.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의 몸으로 날마다 죽게 함으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곧 진멸의 예배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을 따라 본받지 말고,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날마다 새롭게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8:19-20의 지상명령도 역시 진멸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총과 칼로 다른 민족을 진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복음으로써 해야 하는 것이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모든 족속이라는 것은 예외가 없는 것이다. 그들 모두를 복음으로써, 사랑으로써 정복하는 것이 신약적인 진멸의 좋은 예가 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진멸의 의미를 잘 적용할 수 있는 경우는 신약에는 너무나 많다. 즉 사탄, 죄, 세상, 육신 등 우리가 싸워서 진멸시켜야 하는 대상은 너무나 많은 것이다.

4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계수하니
        보병이 이십 만이요 유다 사람이 일만이라
사울은 백성을 들라임에 소집하였다. 들라임은 유다 남쪽에 브엘세바 근처에 있는 들렘과 동일지역이라고 한다. 이렇게 남쪽에 군사들을 소집한 것은 아말렉의 근거지가 남쪽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야베스 길르앗을 구원할 때 동원된 백성이 이스라엘에서 30만, 유다에서 3만이었던 것을 비교하면 이번에는 보병이 20만, 유다 사람이 1만이라고 하였기에 약 2/3정도가 모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다 지파를 제외한 다른 지파들은 이스라엘이라고 불렸다.

5        사울이 아말렉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하니라
6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내려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사울이 매복한 아말렉 성은 어떤 특별한 성이라기보다는 아말렉이 거주하고 있던 주 거주지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아말렉은 어떤 특정한 영토와 도시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 거주지가 있으므로 그곳을 아말렉 성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겐 족속은 모세의 장인 족속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 남쪽의 미디안 지역에서 살고 있었기에 미디안이라고도 불렸지만, 미디안은 지명이고, 겐 족속은 하나의 지파공동체였다. 이스라엘은 이들과 아주 좋은 관계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 거주지가 유다 남쪽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말렉과 섞여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사울은 아말렉을 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이전에 이스라엘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던 겐 족속은 피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던 것이다.

사울은 겐 족속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선대하였다고 하였다. 아말렉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행동을 한 것이다. 모세는 두 번에 걸쳐서 구원을 받았다. 첫째는 바로의 공주에게서 물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두 번째는 이드로에 의해서 광야에서 구원을 받아 그의 사위가 되었다. 이드로가 바로 겐 사람이었던 것이다 (출 2:16-21). 모세의 장인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조직적으로 질서 있게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출 18:9-12). 사사기 4장에 보면 가나안의 군대 장관 시스라가 헤벨의 아내 야엘에게 죽임을 당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헤벨이 바로 겐 사람이었다 (삿 4:17-24).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치기 이전에 겐 사람들을 나오라고 한 것은 순종을 한 것인가? 불순종한 것인가? 분명히 순종한 것이다. 진멸하라고 한 대상은 겐 사람들이 아니라 아말렉이었기 때문이다.

7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하윌라는 아라비아 사막의 북서쪽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남부의 전 지역에 걸쳐서 동으로 하윌라로부터 서로 애굽 앞 술까지 아말렉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친 것이다. 그런데 8절에 보니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았다. 모든 백성들을 다 죽였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진멸하였다.

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이제 사무엘상 기자는 9절에서 분명하게 사울과 그의 백성들이 진멸한 것과 진멸하지 않은 대상들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사람 중에서는 아각만 살려 두었다. 그러나 짐승 중에서는 좋은 것, 기름진 것은 진멸하지 않았다. 오직 가치 없고 낮은 것만 진명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3절에서 분명하게 명령하신 것을 어긴 것이다.

왜 사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을까? 첫 번째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가 사무엘이 명령한 것이 무엇인지 잘못 알아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것이 아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하나님이 명하신 명령을 자기가 새롭게 해석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사울은 하나님이 명령하셨지만, 일부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순종하였고, 일부는 자기의 욕심에 따라서 불순종하였던 것이다.

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사무엘은 전쟁터에 있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한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후회하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그만큼 사울로 인하여 고통스러우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후회하시지도 않으시고, 슬퍼하지도 않으시고, 고통을 겪지도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사고이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울의 무엇이 하나님을 후회하시도록 하였느냐는 점이다. 하나님은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다”고 하셨다. 사울이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지 아니한 것이다. 자기 길을 갔고, 자기의 생각을 따랐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바꾼 것이다.

우리는 그러면 사울보다 얼마나 나은가? 사랑하는 명령, 전도하라는 명령,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얼마나 따랐는가? 우리는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일꾼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마음 아프시게 하고, 더 나아가서 후회하시도록 하지 않는가?

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사울을 만나러 가는 사무엘의 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좋은 소식이 아니라 나쁜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울까? 그러나 사울은 자기가 한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도 모르고, 갈멜에 이르러 기념비를 세웠다. 갈멜은 헤브론 동남쪽 16km 정도에 위치한다고 한다. 그리고 길갈로 다시 갔다. 길갈은 중부이다. 그는 지금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기는 대단히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고 남부에서 전쟁을 하고, 아각 왕과 사로잡은 모든 우양들을 이끌고 가서 기념비를 세웠는가? 그리고 길갈로 갔는가?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조금 작은 일이라도 이루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든 맞지 않던 간에 우쭐해져가지고 자기 자랑만 하려고 한 때가 얼마나 많은가? 마치 자랑하고, 인정받기만 원하고,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내 중심인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사울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배울 것이 너무나 많다. 즉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산에 있는 별 것 아닌 돌이라도 내 산의 옥돌을 가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의 이 속담은 곧 “삼인행(三人行)이면 필유아사(必有我師)”라는 공자의 말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즉 우리는 공자가 세 사람만 있으면 그 중에 나의 스승이 있다는 말은 그의 배우려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다른 사람의 실수나 약점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의 성공이나 장점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 많지만, 사울의 실수와 실패와 약점과 넘어짐을 통하여도 배울 것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사실 사울의 모습을 보면 꼭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나도 또 하나의 사울인 것이다. 얼마나 사람들의 인정에 굶주려 있는가? 다른 사람이 기념비를 세워주지 않으면 나라도 스스로 기념비를 세워서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얼마나 원했는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에 힘쓰자.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컨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사무엘은 길갈로 갔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제 사무엘은 노인이다. 노구를 이끌고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가는 사울의 발걸음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사울은 사무엘은 만나자마자, 사무엘이 그를 왜 찾아왔느냐 하면,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칭찬이라도 해 줄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인사를 한 후에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하였다.

14        사무엘이 가로되
                그러면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
사울의 불순종은 사무엘의 귀에 양과 소의 우는 소리로 들어왔다. 사울과 백성의 탐욕이 사무엘의 귀에 소리의 형태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탐욕을 부린다면, 그 탐욕이 하나님께 어떤 형태로 전달될까? 우리가 우리의 것을 진멸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고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도, 우리의 이웃에게도 다 알려지고, 그것을 통하여 심판과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15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사울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의 선택적 불순종의 이유와 핑계에 하나님을 끌어다 부치는 것이다. 탐욕을 종교적인 제사로 감추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도 진정으로 하나님께 제사하려는 것보다 그냥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그렇게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 만큼 잘못 나간 것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재물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판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인가? 우리의 수단인가? 모든 기복적인 신앙의 문제점은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이나 목표라기보다는 우리의 꿈과 야망과 욕심을 이루는 수단이라는 점이다.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지, 하나님을 위한 내가 아니다. 사울은 이 점에서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로 바뀐 것이다. 그가 언제부터 이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있어서 이제부터의 삶은 자기의 자리와 업적과 인기와 인정 등에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그런 삶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다시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판 적이 없는가?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 명성, 뜻, 말씀, 교회를 판 적이 없는가? 나의 욕심을 관철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용하려고 한 적이 없는가? 최근에 본 어느 영화에서 신앙이 좋은 한 할머니는 사랑하는 남편이 죽자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러자 그녀의 손녀가 “기도한다고 신의 마음이 바뀌나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할머니가 “너는 순서를 거꾸로 알고 있구나.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란다.”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마치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려는 듯이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맞추어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가로되
                        말씀하소서
“말해 봐라”라는 뉘앙스가 아닌가? 아직도 자기가 무엇을 잘 못했는지 모르는 것이다.

17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사무엘이 사울에게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라고 말한 것은 9:21절과 10:22에 잘 나타나 있다. 사무엘과 사울이 처음 만나기 이전에 하나님은 사울을 택하셔서 그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비의 집이 아니냐”고 하였다. 그때 사울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였는가?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9:22). 사무엘의 말대로 사울이 스스로를 작게 여기도 있었을 때였다. 영어 표현에 의하면, “당신의 눈에 당신이 작았을지라도”이다. 즉, 사무엘이 강조하는 것은 사울이 겸손하였을 때에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머리, 즉 지도자와 왕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10:22에서는 사무엘이 모든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서 제비로 왕을 선출할 때, 사울이 뽑혔으나 사람들이 그를 찾지 못하였을 때에, 여호와께서 “사울이 행구 사이에 숨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내용이다. 그만큼 그는 스스로를 작게 여겼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겸손한 눈으로 바라볼 그 때에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것은 열등감이나 비굴한 것과는 구별되어야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얻는 자보다 더 용사이기 때문이다. 사울은 자기의 직책과 직분과 자리를 자기의 개인의 꿈과 야망을 실현하는 자리로 여겼던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던 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근본적인 신분과 사명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의 욕심과 정욕에 이끌리어서 행동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8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길로 보내다”는 말은 “사명을 주어서 보내다”라는 의미의 관용어이다. 한글 개역은 직역을 하였고, 영어 NIV는 의역을 하였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사명을 주어서 보내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3절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유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미 “진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절대로 잘못 들을 수 없는 그런 명령이었다. 진멸의 의미를 모를 사람은 당시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15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듣는다”는 단어이다. 1절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여기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할 단어가 바로 “들으소서”이다. 15장 말씀은 이 듣는다는 단어에 의해서 진행되어지는 것이다. 사울의 사명은 바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명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구한다고 하면서 얼마나 인간의 목소리를 첨가하는 경우가 많은가? 얼마나 하나님의 음성을 가감하는 경우가 많은가? 하나님의 목소리대로 곧이곧대로 순종하는 자녀들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자.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을 분석하기를 그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했다”고 하였다. 즉 사울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대신에 그의 안에서 들리는 탐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고, 안에서 드리는 탐심의 목소리를 들으면 결국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사무엘의 진단에 의하면 사울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척했지만, 자신의 탐심에 이끌리어 재물을 주인으로 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행위이다. 우리는 우리의 무엇에 이끌리어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못하게 되는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그것은 또 다른 탐심이 아닌가? 좀더 가지려고 하고, 좀더 올라가려고 하고, 좀더 편해지려고 하고, 좀더 즐기려고 하고, 좀더, 좀더, 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목소리를 거역하고 있지나 않은가?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골 3:5)라고 하였다. 우리가 탐심을 가지고 있으면, 곧 탐심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이웃도 보이지 않고, 결국 자신을 철저하게 망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굳이 구약에서 아간이나 신약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탐심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늘 주의해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사울은 아직도 진실을 보려고 하는 마음이 부족하다. 그는 자기가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였다고 변명한다. 사무엘이,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자기의 변명에 속아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그러나 혹 자기는 속을지 모르지만, 어느 누구도 속지 않는다는 것을 사울은 몰랐다. 스스로 눈을 가리고 하늘이 없다고 하면, 그 사람만 하늘을 보지 못하고, 자기의 눈에만 하늘이 보이지 않지만, 자기가 하늘이 없다고 믿고, 자기의 눈을 가리면 자기만 하늘을 보지 못하고, 모든 사람들은 하늘을 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사울은 자기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다”고 하였다. 이것이 진멸이 아닌 것은 누구도 아는 것이다. 왜 아각 왕을 살려서 끌어왔는가? 인도주의적 마음으로 그를 끌어온 것인가? 그것이 아님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울은 여자와 아이와 노약자를 살려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던” 것이다. 그가 아각을 살려서 끌고 다니는 것은 자기의 승리에 대한 또 하나의 기념비로 삼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갈멜에 기념비를 세운 사울은 아각을 끌고 다니면서,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를 자기가 진멸하였고, 그 원수의 우두머리를 이렇게 끌고 다닌다는 것을 보여주고, 백성들의 사울 자신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즐기려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 또한 이런 실수를 얼마나 많이 하는가? 하나님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순종하려고 하는 대신에 우리들의 승리를 뽐내고 싶어서 우리들의 전리품을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시하는가? 우리가 자신을 나타내 보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을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순종하는 대신에 세상과 육신과 사탄의 목소를 듣고 있는 것이다.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계속되는 사울의 변명은 이미 15절에서 하였던 변명의 반복이다. 우선 15절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양과 소를 취한 주체는 사울이 아니라 백성들이라는 주장이다. 15절에서도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라고 하였다. 자기는 미꾸라지 같이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사울이 그런 것이 아니고 백성들이 그렇게 하였다 할지라도 사울은 백성을 잘못 인도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맹세하게 하여 전쟁 마당에서 하루 종일 금식하게 하였을 때, 백성들은 모두 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사울의 말을 순종하였던 것을 기억해 보라. 사울이 여기서 백성들을 들먹이는 것은 자기의 불순종과 탐욕에 의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죄악을 저지를 것을 부인하고 계속 변명하고자 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라는 말의 영어 NIV 번역을 보면 “the best of what was devoted to God”라고 되어 있다. 즉 진멸하는 것이 곧 여호와께 바쳐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진멸함으로 여호와께 바친다는 것과 동일한 맥락에 서 있는 표현인 것이다. 원어는 진멸의 의미로 번역되는 “하렘” 혹은 “헤렘”인데, 영어 NIV는 그 의미를 따라서 번역한 것이다. 즉 사무엘이나 사울이나 백성들이나 “진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 때에 그 의미는 여호와께 바친다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을 강조하는 번역이다. 사울이 말하는 것은 진멸함으로 여호와께 바칠 것 중에서 제사 드리려고 일부러 구별하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사울의 말이 참으로 그럴 듯하기 때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이 드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울은 사무엘이 자기를 탐심에 가득 차서 여호와의 명령을 순조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으나, 자기는 탐심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열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였다고 한 것이다. 말은 분명히 맞는 것 같은데,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게 반박할 말을 할 수 없을 텐데, 사무엘은 어떻게 말하였는가? 말은 잘하지만, 계속 틀린 말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궤변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말은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반박할 말은 없는데, 사실은 다 틀린 말만 하는 것이다. 사울이 지금 그런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전통에 따른 궤변을 지적하신 적이 있다. 즉 “고르반”의 전통을 지적하신 것이다. 재물로 부모를 섬겨야 하는데,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그 재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로 성전에 바친다고 “고르반”이라고 한 후에, 하나님께 드리지도 않고, 부모를 섬기지도 않고, 자기의 탐심만 채우는 것이다. 우리도 동일한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무엘 선지자의 말은 이런 말이다. “사울 왕이여, 당신은 하나님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선행적인 명령을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목소리를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그 목소리를 불순종한 다음에 드리는 번제와 다른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을 드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사울 왕이여, 당신은 크게 착각하였습니다.” 사무엘은 불순종에 근거한 의식으로서의 예배보다는 순종으로서의 예배를 하나님이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그것을 가지고 예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릴 때에 하나님은 그 예물을 얼마나 역겨워 하실까 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몇몇 참고 구절을 찾아보자. 먼저 시편 40:6-8이다.
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편 51:16-19도 보아야 한다.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마지막으로 이사야 1:11-13을 보자.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사무엘은 거역과 사술의 죄를 완고한 것을 우상 숭배와 동일하게 다루고 있다. 구약에서 가장 무서운 죄가 우상숭배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 마음이 굳고 목이 곧아서 완고한 것을 우상숭배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 불순종은 곧 우상숭배일까? 불순종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신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곧 우상숭배이다. 불순종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신에게 있는 정욕과 욕심과 탐심을 섬기기에 우상숭배이다. 자신의 옛 자아요, 옛 성품인 육신을 섬기는 것이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이유는 사울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주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울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사울이 왕으로 존재할 필요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사무엘의 말대로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에 여호와께서도 사울을 버려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동일한 논리가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의 일꾼 삼으시고, 하나님의 교회로 삼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하나님이 듣기를 원하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조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려고 하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존재하게 하시는 그 목적을 온전하게 이루는 주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란다. 말 그대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서, 그 목적대로 순종하는 자녀들이 되자.

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은 전적인 항복을 하지 않는다. 죄를 지었음을 고백하지만, 그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핑계 댈 구실을 찾다가 백성들을 들먹이는 것이다. 그가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탐심의 말을 따랐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백성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도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이다.

25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사울에게서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적인 회개이다. 그러나 그는 솔직하지 못하다. 그는 자기의 체면만 생각한다. 하나님께 경배하려고 하는 것도 그가 지은 잘못을 무마하려고 하는 시도에 불과하다.

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그에 대한 사무엘의 태도는 단호하다.

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무엘상 15장의 사건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사울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인 순종을 하게 된다. 아말렉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들은 아말렉 사람은 아각 왕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죽였다. 아마 왕을 남겨 둔 것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승리의 기념으로 보여주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짐승을 진멸하라고 한 부분에서는 자기들이 눈에 보기에 좋은 것들은 살려두고, 보기 좋지 않은 것만 죽였다. 이것은 진멸이 아니다. 진멸이란 모든 동물을 다 죽이는 것이어야 했다. 부분적인 순종은 결국 불순종이라는 사실을 사울과 그 백성들은 일부러 간과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만 해석했던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자기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철저히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부분적인 순종으로 인한 불순종의 삶을 살게 되고 말 것이다.

사울은 브엘세바 남쪽에서 전쟁을 한 후에 아각 왕과 아말렉에게서 탈취한 짐승들을 갈멜까지 가서 전승비를 세웠다. 누가 봐도 사울은 승리에 도취해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지금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있는지, 불순종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단지 자기의 전쟁의 승리가 곧 하나님 앞에 순종이라고만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잘 나갈 때, 승리할 때, 성공할 때, 마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을 주신 것으로만 해석하기 쉽다. 오히려 이러한 때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사울이 승리에 도취해 있던 그 때에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사무엘을 사울에게 보내셨고, 그들은 길갈에서 만났다. 아직도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울에게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유명한 선언을 하여준다. 성경 전체에서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가 순종이다. 순종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세워준다. 불순종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게 해준다. 의로운 삶은 바로 순종하는 삶이다. 불의한 삶은 곧 불순종하는 삶이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후에 사울을 떠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사무엘을 강청하여 잡는다. 그냥 잡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겉옷자락을 강하게 잡았다. 절대로 사무엘이 그냥 떠나보낼 수는 없다는 사울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사울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이었는지 알려 주는 대목이다. 사울은 순간적으로 강하게 붙잡았고, 사무엘은 강한 마음으로 사울을 떠나가려고 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무엘의 겉옷 자락이 찢어졌다. 히브리인의 겉옷은 오늘날의 우리의 옷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로 긴 원통형이다. 이 옷을 강하게 잡아당길 때, 찢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순간적으로 주는 힘이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은 모두다 체험으로 알 것이다. 분노로 한 번의 주먹질을 한 것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세의 경우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출 2:12).

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사무엘은 자기의 겉옷이 찢어진 틈을 타서 사울에게 예언을 한다. 그 예언은 사울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무엘은 “왕이 나의 옷을 찢었으니 옷값을 변상해 주세요”라고 하는 대신에 사울 왕이 사무엘의 옷을 찢은 것처럼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사울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이웃에게 주셨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는 사울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너보다 나은 이웃”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을까? 그러나 낫다는 것이 원래부터 낫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여부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 우리도 더 나은 이웃이 될 수도 있고, 사울과 같은 위치에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사무엘은 이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선언을 한다. 하나는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사울에게 왜 중요한 것이 되는가? 하나님의 명령에는 그에 따른 상급이 있고, 그에 따르지 않는 벌칙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짓이 없으시다는 말은 곧 사울의 불순종에 대하여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그가 변개치 않으신다는 것은 사울의 불순종에 대하여 심판을 하심에 있어서 마음을 바꾸시지 않으실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로써 재심의 청구가 기각된 재판과 같이 사울의 죄는 분명하게 드러났고, 그에 따른 선고도 분명하게 세워졌다. 사울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 지점에서 왕위를 내어 놓았다면 어떠했을까? 왕은 자기 말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는 왕위를 내놓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시점부터 더 왕위에 대하여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30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사울은 먼저 자신이 죄를 범하였음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이 고백은 용서를 청하기 위한 순수한 고백과는 성격이 먼 것이다. 사울은 사무엘이 “너는 죄를 범하였다”라고 하는 말에 “맞다. 나는 죄를 범하였다”라는 정도의 고백이었다. 그는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가 관심을 갖는 문제는 왕으로서 그 자신의 자리였다. 권위와 자리와 위신과 위치와 체면과 모양새를 중시했다. 그래서 그가 부탁한 것은 자신의 백성들의 앞과 그 백성들의 지도자들 앞에서 자신의 권위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미 자신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그는 사무엘을 이용하고, 사무엘을 의지하고 싶었다. 사울에게 있어서 사무엘이 지금 시점에서 그냥 떠나가는 것은 자기의 권위와 위신이 심각하게 구겨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사무엘이 다시 사울과 함께 돌아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자기가 마땅히 가져야할 존경과 영광과 권위와 위신을 갖는 것을 의미했다. 사무엘을 모시고 가서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자신의 권위를 높여 준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 사무엘이 자기를 추인해 주는 것이 이 시간의 사울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뭔가 잘못된 것 같지 않은가? 예배란 모름지기 하나님이 높임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사울은 예배에 사무엘이 있으면 자기가 높아진다고 생각하였다. 사울이 예배하는 목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높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잘못된 것으로 흘러가기 쉬운지 알 수 있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 예배하느냐에 의해서 우리의 예배의 질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는 함께 예배하느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에 의해 달려 있는 것이다 (요 4:24).

31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이 상황에서 사무엘은 그의 마음을 바꾸어 사울과 함께 진영으로 돌아갔다. 어떤 면에서는 사울을 용납한 부분도 있고, 아각 왕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울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했다. 제사라는 말과 예배라는 말이 다르기 때문에 희생이 없는 예배를 드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만약 이 예배에서 사울과 사무엘은 짐승을 드리는 희생 제사를 드렸을까? 그랬다면 어떤 짐승을 사용하였을까? 아말렉으로부터 탈취한 그 짐승들을 사용하였을까? 그랬다면 그 나머지는 어떻게 하였을까?

32                사무엘이 가로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가로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아각은 자기의 모든 백성들이 다 죽었는데도 살아 있었다. 사울이 그를 살려서 끌고 다녔기 때문이다. 아각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 살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사무엘이 아각을 끌어 오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아각은 사무엘에게 끌려오면서 사무엘이 그를 살려 줄 것으로 생각해서 기쁨에 가득하게 되었다. 자기가 해왔던 악행은 생각지 않고, 살 생각만 한 것이다.

33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사무엘은 아각을 여호와 앞에서 쪼갰다. 즉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여기서 “쪼개다”라는 말은 언약 (베리트)의 어원이 된 “카라트” (자르다)가 아니라, “솨싸프”로써, 잘게 조각내는 것을 말한다. 영어 NIV는 단지 죽였다고만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부드러운 번역을 고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가능한 한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난도질하였다”는 표현이 훨씬 더 원어에 가까운 번역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무엘은 왜 아각을 이렇게 난도질하였을까? 먼저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 진멸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앞에서 찍었다고 하였다. 두 번째는 백성들과 사울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기를 원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사무엘은 백성들이 아말렉으로부터 끌고 온 짐승들은 어떻게 하라고 하였을까? 아각을 이렇게 난도질하여 죽인 것을 보아서 우리는 어떤 상상을 할 수 있을까?

34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본집으로 올라 가니라
사울과 사무엘이 헤어진다. 어떤 면에서 사무엘과 사울은 스승과 제자의 사이로 출발해서, 선지자와 왕의 사이가 되었다가, 이제는 남남으로 헤어지는 것이다.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사무엘이 사울을 이때 헤어진 것이 마지막으로 사울을 본 것이다. 그러면서 사무엘은 사울을 향하여 평생 슬퍼하는 마음을 가졌다. 또한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 누가 우리로 인하여 슬퍼하는 마음을 갖고, 하나님이 나로 인하여 후회하는 후회하시는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해보자.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황인가?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이렇게 사람들을 슬프게 하고,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사무엘과 사울은 화해가 가능했을까? 사울이 변화가 없는 한 화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울은 자기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설 수 있을까에 대한 진정의 몸부림이 없었다. 그냥 자기의 자지를 지키는 것에만 전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사무엘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계속 실패의 나락으로 내닫고 있었다.

제 16 장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사건이 있은 후 구체적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 앞에서 왕으로서의 자격을 잃은 것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슬픔 가운데 쌓여 있었다. 사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슬퍼하였을까? 아마도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왕이 되어서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그 상태를 슬퍼하였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사울의 영적인 상태를 안타까워하며 슬퍼하였을 것이다. 사무엘의 슬퍼함을 보고, 우리도 그러한 슬픔이 있는 지 돌이켜 보도록 하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신다. “네가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이 말씀에는 사울의 심정을 하나님이 이해하시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셔야 한다는 엄연한 선언이 담겨 있는 것이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에 사울은 왕의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

특별 설교

This board is for special day sermons.

  1. No Image

    성경의 파노라마 23 (4/5/06) 제 4-19 과 "사무엘상 (7)"

    성경의 파노라마 제 23 강 (4/5/06) 제 4-19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7) 오늘 공부할 부분은 사무엘상의 마지막 부분으로 사울의 몰락이 나온다. 사무엘상 26, 27, 28, 29, 30, 31장을 다룬다. 제 26 장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다시 사울의 생명...
    Date2006.04.16 By최정인 Reply0
    Read More
  2. No Image

    [re] 성경의 파노라마 23 (4/5/06) 제 4-19 과 "사무엘상 (7)"

    http://www.kccbr.com/data/bible_wed/wed_040506.wma >성경의 파노라마 제 23 강 (4/5/06) >제 4-19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7) >오늘 공부할 부분은 사무엘상의 마지막 부분으로 사울의 몰락이 나온다. 사무엘상 26, 27, 28, 29, 30, 31장을 ...
    Date2006.04.23 Bywebmaster Reply0
    Read More
  3. No Image

    성경의 파노라마 22 (3/29/06) 제 4-18 과 "사무엘상 (6)"

    성경의 파노라마 제 22 강 (3/29/06) 제 4-18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6)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사울의 통치 말기와 다윗의 방황기에 관한 부분으로 사무엘상 19, 20, 21, 22, 23장을 이룬다. 제 19 장 1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Date2006.04.02 By최정인 Reply0
    Read More
  4. No Image

    [re] 성경의 파노라마 22 (3/29/06) 제 4-18 과 "사무엘상 (6)"

    http://www.kccbr.com/data/bible_wed/wed_032906.wma >성경의 파노라마 제 22 강 (3/29/06) >제 4-18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6) >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사울의 통치 말기와 다윗의 방황기에 관한 부분으로 사무엘상 19, 20, 21, 22, 2...
    Date2006.04.04 Bywebmaster Reply0
    Read More
  5. No Image

    성경의 파노라마 21 (3/22/06) 제 4-17 과 "사무엘상 (5)"

    http://www.kccbr.com/data/bible_wed/wed_032206.wma성경의 파노라마 제 21 강 (3/22/06) 제 4-17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5)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사울의 통치 중기에 관한 부분으로 사무엘상 15, 16, 17, 18, 19장을 이룬다. 제 15 장...
    Date2006.03.22 By최정인 Reply0
    Read More
  6. No Image

    성경의 파노라마 20 (3/15/06) 제 4-16 과 "사무엘상 (4)"

    http://www.kccbr.com/data/bible_wed/wed_031506.wma성경의 파노라마 제 20 강 (3/15/06) 제 4-16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4)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사울의 통치 전반(前半)에 관한 부분으로 사무엘상 11, 12, 13, 14장을 이룬다. 제 11 ...
    Date2006.03.19 By최정인 Reply0
    Read More
  7. No Image

    성경의 파노라마 19 (3/8/06) 제 4-15 과 "사무엘상 (3)"

    성경의 파노라마 제 19 강 (3/8/06) 제 4-15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3)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사물엘의 통치와 사울이 왕으로 세움을 입는 내용으로 사무엘상 7, 8, 9, 10장이다. 사무엘상의 첫 몇 장은 이스라엘의 지도력이 엘리 제사장...
    Date2006.03.12 By최정인 Reply0
    Read More
  8. No Image

    성경의 파노라마 18 (3/1/06) 제 4-14 과 "사무엘상 (2)"

    성경의 파노라마 제 18 강 (3/1/06) 제 4-14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2)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은 언약궤의 행로이다. 사무엘상 4, 5, 6장에 이르는 이 부분은 쉽게 간과되기 쉬우나 우리에게 중요하고도 많은 영적인 교훈을 전달해 주고 있...
    Date2006.03.02 By최정인 Reply0
    Read More
  9. No Image

    [re] 성경의 파노라마 18 (3/1/06) 제 4-14 과 "사무엘상 (2)"

    http://www.kccbr.com/data/bible_wed/wed_0301.wma >성경의 파노라마 제 18 강 (3/1/06) >제 4-14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2) >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은 언약궤의 행로이다. 사무엘상 4, 5, 6장에 이르는 이 부분은 쉽게 간과되기 쉬우나 ...
    Date2006.03.11 Bywebmaster Reply0
    Read More
  10. No Image

    성경의 파노라마 17 (2/22/06) 제 4-13 과 "사무엘상 (1)"

    성경의 파노라마 제 17 강 (2/22/06) 제 4-13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1) 오늘부터 우리는 사무엘상에 대하여 공부한다.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원래 한 권이었던 것을 주전 250년경 헬라어로 번역할 때, 양을 감안해서 상...
    Date2006.02.26 By최정인 Reply0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 55 Next
/ 5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