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ose Your Language:
한국어/Korean   영어/English

http://www.kccbr.com/data/bible_wed/wed_031506.wma성경의 파노라마 제 20 강 (3/15/06)
제 4-16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4)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사울의 통치 전반(前半)에 관한 부분으로 사무엘상 11, 12, 13, 14장을 이룬다.

제 11 장
1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암몬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으로부터 유래한 족속이다 (창 19:38).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당시에 그의 아내를 잃고, 두 딸을 데리고 소알의 동굴로 피신했다.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아버지를 통하여 아들들을 얻었다. 큰 딸이 난 아들은 모압이요, 모압 족속의 조상이 되었다. 작은 딸이 난 아들은 벤암미요,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던 것이다. 암몬 족속은 요단강 동편, 모압 족속의 북쪽에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서 이스라엘 족속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에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다. 에돔 족속은 에서의 후예요, 모압과 암몬은 롯의 후예이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치지 못하게 하셨다 (신 2:1-19). 하나님은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다.”라고 하셨다.

사사 시대에 사사 입다가 맞서 싸운 족속이 바로 암몬 족속이었다. 암몬 족속의 왕이 군사를 모아서 길르앗 지역을 침입한 것이었다. 이때 입다는 암몬 족속의 왕에게 지나간 역사를 요약해 주면서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은 가하지 못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였다. 그러나 암몬의 왕은 막무가내였고, 결국 입다는 암몬 족속을 무찌르고, 항복을 받아내었다 (삿 11:1-33).

그 암몬 사람들이 요단강 동편에 거한 길르앗 야베스 지역을 침공한 것이다. 길르앗 야베스 지역은 므낫세 지파에 속한 성읍이었다. 암몬 족속의 왕의 이름은 나하스였다. “나하스”는 사사 입다의 시절에 당한 수치에 대하여 복수하려는 마음으로 가득하였던 것 같다. 나하스는 히브리어로 “뱀”이라는 뜻이다. 뱀이 혀를 내밀고, 내는 소리를 의성화하여 만든 단어일 것이다. 에덴동산에 사탄이 뱀으로 침입하여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공격하였듯이, 암몬 족속의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 지역을 침공한 것이다. 야베스 주민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우리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고 하였다. 즉 “베리뜨”를 맺자고 한 것이다. 베리뜨는 언약이나 조약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지기도 하지만, 전쟁에서 이긴 나라와 진 나라 사이에 맺어진다. 이 경우 불평등한 조약이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야베스 지역 주민들은 나하스에게 항복을 하고, 그러한 불평등한 조약을 맺을 것을 제의하였다. 보통 이렇게 나오면 항복을 받고, 조약을 채결하고, 조공을 받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나하스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2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나하스의 반응은 너무나 잔인한 것이었다. 모든 야베스 주민들의 오른 눈을 다 빼어야만 그들과 언약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잔인한 모욕이 단지 그 지역뿐만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을 상대로 이루어질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문명 세계에서 볼 때에는 너무나도 잔인한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전쟁은 이렇게 인류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는 것이다.

3        야베스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유예를 주어
                우리로 이스라엘 온 지경에 사자를 보내게 하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
야베스 장로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하스에게 일주일의 유예 기간을 요청했고, 이스라엘 온 지경에 사자를 보내어 구원자를 찾겠다고 하였다. 그래도 구원자가 없다면, 나하스에게 나아가서 모든 백성이 오른 눈을 뽑힐 각오를 하였다. 나하스는 야베스 주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고, 구원의 기회를 주어도 절대로 그들이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도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구원을 향한 기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므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피할 길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사람이 감당한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1:13).

4        이에 사자가 사울의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고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사자들은 물론 이스라엘의 다른 곳으로도 갔을 수도 있지만, 사울이 있는 기브아에 왔다. 이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물론 그 첫 번째는 사울이 최근에 모든 백성들이 모인 미스바에서 왕으로 선출된 것 때문이다 (삿 10:17-27). 그러나 두 번째는 베냐민 지파가 전 지파를 상대로 전쟁을 치렀을 때, 모든 사람이 다 죽고 남자 600명만 남았던 때에, 그 전쟁에 오직 야베스 길르앗 지역 사람들만 참석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그 지역에 12,000 명의 군사를 보내어 거민들을 죽이고, 처녀 400명을 납치해 와서 베냐민 용사들과 결혼하도록 하였던 배후 역사 때문이었다. 즉 베냐민과 길르앗 야베스는 서로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삿 21:8-12).

사자들은 사울의 기브아에 이르러, 아직 사울을 만나지 못하였지만, 이 슬프고도 화급한 변고의 소식을 알렸다. 그리하여 기브아의 모든 백성들의 소리를 높여 울게 되었다. 지도자가 없는 백성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5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가로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로 고하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들에게 지도자를 허락하셨지 않은가? 그러나 그 지도자는 지금 밭에서 소를 몰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왕으로 세움을 입었지만, 아직 그에게는 구체적인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었다. 사울은 그냥 허송세월을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울은 마을로 돌아와서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알고,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물었고, 길르앗 야베스 지역에 국가적인 재난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6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하나님의 신은 사울로 하여금 크게 감동하게 하시었고, 그 결과 사울은 큰 노가 충만해졌다. 거룩한 분노를 느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이 하시는 여러 가지 일들 중의 하나이다.

7        한 겨리 소를 취하여 각을 뜨고
        사자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경에 두루 보내어 가로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그는 두 마리의 소를 잡아 각을 떴다. 아마 한 마리에 여섯 조각씩을 내어 모두 열 두 조각을 내었을 것이다. 사사기에 나오는, 자기 첩의 시신을 열 두 조각내어서 이스라엘 전역으로 보내었던 일이 생각나게 하는 본문이다 (삿 19장 참조). 그러면서 사울은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고 선언하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사무엘의 지도력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셨고,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던 모든 일을 버려두고 사울에게 집결하였다. 전쟁은 이와 같이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하는 특징이 있는 것이다.

8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을 계수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이더라
집결 장소는 베섹이었다. 요단강 서안으로, 세겜으로부터 약 27.2km 정도 북쪽에 위치하였다. 군사는 이스라엘 30만, 유다 3만으로 33만 명의 대군이었다. 여기서도 이미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이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파 공동체이지만, 유다는 늘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

9        무리가 온 사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
                하라
        사자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베섹에 집결한 무리들은 이제 사자들은 길르앗 야베스로 돌려보냈다. 물론 그들은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간 것이다. 사자들의 임무는 이렇게 막중한 것이었다. 그들은 사울의 기브아로 왔고, 정확하게 진상을 알렸고, 군사들이 33만 명이나 모이는 것을 보았고, 구원의 약속을 들었고, 다시 돌아와서 정확하게 전했고, 그리하여 백성들은 죽음의 목전에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지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4-5).

10        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가로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소견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이제 야베스 사람들은 당당해졌다. 그러나 겉으로는 항복하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아마 여기서 말하는 내일이 일주일이 된 날일 수도 있다. 나하스와 암몬 사람들은 이제 내일이면 야베스를 치고 전쟁에서의 승리하고 정복자의 기쁨을 누릴 것을 기대하면서, 아무런 의심이 없이 그 날 밤에 잠에 들었다.

11        이튿날에 사울이 백성을 삼대에 나누고
        새벽에 적진 중에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사울의 행동은 신속하고 정확하였다. 그는 군사들을 삼 대로 나누었다. 나하스가 아무런 방비도 없이 그의 군사들과 꿈에 젖어서 잠이 들어 있는 동안, 요단강을 건너 밤새 행군하여 새벽에 적진에 들어갔다. 새벽에 시작된 공격은 날이 더울 때까지 계속 되었고, 결국 암몬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물론 야베스는 해방되었고, 기쁨에 가득하였다.

12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도 전에 일부의 무리들이 사울을 전날에 멸시하였던 비류들에 대하여 공격적인 언행을 하면서 사무엘에게 청원하였다. 아마 사무엘은 노구를 이끌고 이 전쟁에 함께 참여하였을 수도 있다. 사울이 왕으로 뽑혔을 때,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은 사울과 함께 갔지만, 어떤 비류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며 멸시하였던 것이다 (삼상 10;27). 그에 대한 사울의 반응은 잠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비류들을 끌어내어 죽이자고 하는 것이다. 좋은 일이 있고 나서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로 나아간다.

13        사울이 가로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사울은 그러한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음을 정확하게 하였다.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셨지, 자신이 구원한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의연하고, 겸손한 젊은 시절의 사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4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여기에서 “나라”라는 말은 사무엘상 10:16에서 나온 것처럼, kingship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사무엘은 이러한 일들을 길갈에서 행하고자 하였다. 길갈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넌 후,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모든 백성들이 할례를 행할 곳이었다. 여호수아는 길갈에서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함으로써 나라를 새롭게 하였던 것이다. 이제 사무엘은 동일한 곳에서 사울을 왕으로 확실하게 새우려고 하는 것이다.

15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모든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기름을 다시 부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돌이켜 보면 사울이 왕이 되는 데는 세 가지 큰 단계가 있었다. 첫째로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는 것으로서, 이것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일대 일로 부었던 것이다 (삼상 10:1). 둘째로는 미스바에서 제비를 통하여 사울을 뽑은 후 사무엘은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서 짝할 이가 없느니라.” (삼상 10:24)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비류들은 사울의 왕권을 무시하였다. 이제 셋째로 모든 백성이 그를 왕으로 인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사울이 진정한 왕으로서의 군사적 지도자임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암몬의 나하스가 야베스 길르앗을 쳐 들어온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왕의 권위를 주시기 위하여 허락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눈에는 위기가 보이지만, 위기가 곧 기회가 된다는 것을 늘 알아야 한다.

제 12 장
1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가 내게 한 말을 내가 다 듣고
                너희 위에 왕을 세웠더니
2                이제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하느니라
                보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었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사무엘상 11장은 암몬 족속의 왕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 지역을 침공하여 주민들의 모든 오른 눈을 빼겠다고 위협하였다. 야베스 주민들은 사자들을 사울에게 보내었고, 사울은 온 국민을 모아서 야베스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사무엘은 모든 백성들과 함께 길갈에 가서 사울을 왕으로 정식으로 다시 확증하여 세운다. 11장 15절은 그때의 모습을 이렇게 서술한다.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그 일이 있은 후에 사무엘의 고별 설교가 시작된다. 성경에는 야곱의 유언 (창 49장), 모세의 고별 설교 (신명기), 사무엘의 고별 설교 (삼상 12장), 예수님의 고별설교 (즉, 다락방 강화 요 14-17), 바울의 에베소 장로들에 대한 고별 설교 (사도행전 20장), 그리고 바울의 마지막 편지 (디모데후서) 등의 유명한 고별 설교가 있다.

사무엘은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한 말을 그가 다 듣고, 그들 위에 왕을 세웠으며, 그들의 원대로 왕이 그들 앞에 있다는 말로 그의 연설을 시작한다. 연설이라고 해서 사무엘이 일방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대화체의 연설이다. 그러나 주도권은 사무엘이 쥐고 있으며,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응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여기 1절의 말씀은 현재의 상황을 가장 간략하게 요약하는 역할을 한다. “너희가 원하는 대로 내가 너희의 위에 왕을 세웠고, 그래서 그 왕이 너희 앞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무엘은 자기에 대한 신상 발언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하고 있다.

(1) 자신이 늙어서 머리가 희어졌다는 것이다. 즉 은퇴를 할 때가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또한 사무엘 자신이 늙어 머리가 희어졌다는 것은 그가 그의 평생을 이스라엘을 위해 바쳤다는 것을 회상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어릴 때부터 한 그 일을 후회가 없이 평생을 해서, 그 한 길을 간다는 것도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에 대한 분명한 소명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그 길을 간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덕목인 것이다.

(2) 사무엘은 자신의 아들들이 백성들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비록 그 아들들이 사사로 세움을 입은 후,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 사사의 일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아들들이 백성들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사무엘이 언제 결혼을 하였는지, 누가 그 부인이 되었는지는 정확한 정보가 없지만, 사무엘은 그의 아들들이 커 나가는 것을 이스라엘의 유지들이 다 볼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지도 모른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앞에서 공개된 삶을 살았다.

(3) 사무엘은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백성들을 위하여 일을 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평생을 온전하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백성들을 위하여 헌신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 아닐 수 없다. 나도 이처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며 머리가 늙어지고 은퇴의 설교를 할 수 있을까?

3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사무엘은 자신의 사역을 돌아보며, 백성들과 셈을 하고자 한다. 그 셈에 대한 증인으로 사무엘은 하나님과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 즉 왕 사울을 초청한다. 그러면서 사무엘은 다섯 가지로 백성들에게 자신의 부정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백성들의 재산을 착복하였느냐, 백성들을 속인 적이 있느냐, 백성들에게 위압적으로 대한 적이 있느냐, 재판에서 공정하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뇌물을 취한 적이 있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다 갚겠다고 하였다.

4        그들이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 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 것도 취한 것이 없나이다
속이지도, 압제하지도, 취한 것도 없다고 분명하게 백성들은 대답한다. 사무엘이 결백하고 청렴하게 평생을 일했다는 것을 백성들이 확증한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5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손에서 아무 것도 찾아낸 것이 없음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며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도 오늘날 증거하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그가 증거하시나이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여호와 하나님과 왕 사울이 증인이 된다고 못 박고 있다. 마치 문서를 완성하고, 서명을 하거나,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 것이다.

6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며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여호와시니
7                그런즉 가만히 섰으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행하신
                모든 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
이제는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말씀으로 연결해 나간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다. 하나님이 아무리 좋으신 분이어도, 그 좋으신 분을 백성들에게 나타내 보여주는 영적 지도자의 행함이 따라오지 않으면, 하나님을 좋은 분으로 그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무엘이나 바울이 모본 혹은 모범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했던 이유이다. 그들의 삶이 곧 하나님을 보여 주어야 하는 삶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사장에게, 왕에게,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름을 부음 받아 세움을 입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권위를 나누어 주시는 반면에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는 높은 영적인 수준과 윤리적인 표준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을 당연하게 요구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자기의 깨끗했던 삶을 보여주고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설교한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출애굽부터 시작한다. 모세와 아론을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즉 사무엘은 역사를 간략하게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동안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행하신 것을 백성들에게 대면하여 보여주듯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데, 왜 너희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왕을 구하였느냐고 말하기 위하여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8                야곱이 애굽에 들어간 후
                너희 열조가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사
                그 두 사람으로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이곳에 거하게 하셨으나
다시 사무엘은 야곱이 애굽에 들어간 일부터 말한다. 창세기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400년이 지난 후에 출애굽기가 시작된다. 이스라엘 열조가 고통으로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신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현재 이스라엘이 거하는 가나안 땅에 거하게 하셨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을 간략하게 회고한다. 하나님이 주체이시고, 모세와 아론은 그분의 사역자이고, 백성들은 객체이다. 즉 사무엘은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시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설명하시는 것이다.

9                그들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잊은지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하솔 군장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붙이셨더니
                그들이 치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여호수아를 아는 세대가 지나가자마자, 하나님을 버렸다. 그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 그러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은 하솔 군장 시스라 (삿 4:1-3), 블레셋 사람 (삿 13:1), 모압 왕 에그론 (삿 3:12-14)에게 파셨고, 그리하여 그들이 이스라엘 침공하여 강점하고,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고, 그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10                 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기므로
                        범죄하였나이다
                        그러하오나 이제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를 섬기겠나이다
                하매
그러자 또 백성들이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회개한다. 회개의 전형이 나온다.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기므로 범죄하였나이다” 죄를 고백하고 통회하는 것이 회개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구원과 주님을 섬김을 하나로 연결하여 요구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조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평안히 거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거래와 언약은 비슷한 것 같으나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언약은 선택적 사랑에 근거한 것이어서 깨어지기 어려운 것이지만, 거래는 상대방의 성실성에 근거한 것이어서 한 쪽이 불성실하면 반드시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의 결혼 생활이 거래인가? 아니면 언약인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거래인가? 언약인가? 자녀가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공부를 잘못하면 미워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언약적인 사랑으로 사랑하기에 공부를 잘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속이 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도 그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보이시든 간에 그것은 그분의 선택과 구원과 언약과 섭리와 그분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심정을 알면, 우리는 성숙한 신앙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11                여호와께서 여룹바알과 베단과 입다와 나 사무엘을 보내사
                너희를 너희 사방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사
                너희로 안전히 거하게 하셨거늘
하나님은 심판에서도 사람을 사용하시고, 구원에서도 사람을 사용하신다. 심판은 이방인들을 사용하셨고, 구원은 사사들을 사용하셨다. 사무엘은 그 사사들을 기드온과 바락과 입다와 사무엘 자신을 들었다. 베단은 잘 알려지는 않은 사사이거나, 바락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70인역은 바락으로 고쳤고, 그래서 영어 NIV도 그 전통을 따랐다. 사무엘의 논조는 백성들이 죄에서 벗어나면, 평화가 오는데, 백성들이 그들의 행복의 조건을 왕의 유무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12                너희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의 너희를 치러 옴을 보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실지라도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
이제 사무엘은 최근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킨다. 나하스가 쳐들어 온 것을 보고 다시 백성들은 비록 여호와가 왕이 되실지라도 그들이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고 다시 말하였다는 것이다. 여기 12절이 그 동안의 모든 것의 요약이 된다.
        상황: 외적의 침입
        하나님의 해결: 하나님이 왕이시다
        백성의 해결: 우리에게 인간적인 왕이 필요하다.
사무엘은 분명한 논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한 것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한 것임을 분명히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점을 이미 8:7에서 분명하게 하셨다.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삼상 8:7)

또한 이 구절을 통하여 사무엘은 서로 다른 세 왕들을 등장시켜 비교하고 있다.
        (1) 암몬 왕 나하스: 이스라엘을 침공한 왕.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러워하던 열국의 왕들 중의 하나. “그들에게 왕이 있으므로 우리도 왕이 있어야 한다.”고 이스라엘이 생각하게 한 왕들 중의 하나.
        (2) “여호와 하나님 너희의 왕”: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 그분만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인간적인 왕을 요구한다.
        (3) “우리를 다스릴 왕”: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왕보다는 눈에 보이는 인간-왕을 요구하고 있다.

13                이제 너희의 구한 왕,
                너희의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
사무엘은 세 가지로 말한다. 너희들이 왕을 구했고, 너희들이 왕이 택했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너희들 위에 왕을 세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자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하나님은 왜 그들에게 이러한 허용적인 왕을 세우셨을까? 하나님이 기뻐하지도 않으시면서 그들에게 왕을 주신 것은 (1) 심판일까? (2) 사랑일까? (3) 심판이면서 사랑일까? (4) 심판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실까?

나는 이렇게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최고의 상태로 순종할 때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나님은 비록 우리가 안타까운 상태에 있을때에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을 때에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의 자녀들이 언제나, 최고의 상태에 있기에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14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좇으면
                좋으니라마는
우리가 공부한 내용은 사무엘의 고별 설교의 앞부분이었다. 사무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번성하는 길을 요약하여 설명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사무엘의 설교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요구 사항은 구약 성경 전체의 맥락을 연결하는 주제의 핵심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명령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구약 성경을 공부하며 얻은 결론과도 같은 것이다. 14절에 나오는 조건,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번영하기 위한 조건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순종의 주체                순종의 대상                순종의 내용
----------------------------------------------------------------------
“너희가”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너희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좇으면”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 사이에는 아무도 없다. 이스라엘의 왕도 이스라엘을 대신할 수 있는 중보자는 아니다. 이스라엘의 왕도 역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하는 순종의 주체일 뿐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하여 해야 할 일을 다섯 가지의 동사로서 요약해서 강조하고 있다.

(1) 경외하라: 경외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동사 arEy:(yare')의 번역이며, 이 단어에 해당하는 명사는  ta'r]yI(yir'aht)이다. 경외란 피조물로서의 이스라엘이 조물주로서의 하나님께 대하여 취하여할 마땅한 자세를 정의하는 대표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잠언 1:7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유명한 정의가 나오며, 전도서의 마지막에서는 모든 인간에게 주는 권고로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경외는 공포와 다른 것이다. 경외하는 것에는 사랑하는 것이 포함된다. 친밀하면서도 크게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이것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인간은 가까워지면 무시하기가 쉽다. 가까이 지내면서도 존경을 받는 것은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진정으로 존경받을 사람은 가까운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친해져서, 하나님과 가까워져서 하나님이 우습게 느껴지는 사람이 혹시 있는가? 그것은 경외도 아니고, 친밀함도 아니다.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거움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2) 섬기라: “섬기다.”는 히브리어 db'[(아바드)의 번역이다. 종이 주인을 섬겨서 열심히 일을 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경외함이 태도에 관한 중요한 단어라면, 섬김은 행동을 지칭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영어에서는 섬김이 곧 예배라는 단어도 되며, 이것은 한국어에서도 비슷한 의미가 있다. 신을 “섬긴다,” 혹은 “위한다.”라고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예배해야 하는 대상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라는 것을 사무엘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구약 전체를 통해서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제사를 드리는 것을 포함하여 삶 자체가 곧 제사를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실제의 생활로서의 드리는 제사가 없는 형식으로서만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을 역겹게 하는 것이다.

(3) 목소리를 들어라: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신명기 6:1에서 모세가 말한 것처럼 [m'v(;솨마)이다. 신명기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들으라 이스라엘아”라고 하여서 “쇄마 이스라엘”이라고 하였다. 신명기 6장은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구절로도 유명하다.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도, 그 명령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파악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것은 곧 그 내용을 순종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듣는다는 것은 곧 청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목소리의 형태로 전달된 것은 최초의 청중들에게는 일반적인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이후에는 선지자들의 목소리로, 더 나아가서는 해석자들의 목소리로, 더 나아가서는 독자들의 독서로까지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법이 발전해왔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목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울렸을 때, 그 말씀의 요구대로 우리의 마음과 철학과 생각과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 곧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4) “명령을 거역하지 말라”: “거역하다”라는 단어는 그 유명한 hr;m; (마라)이다. 출애굽기에서 나오는 그 유명한 쓴 물을 내었던 호수가 곧 마라이다. 마라라는 오아시스가 그런 이름을 가진 이유는 곧 그 물의 맛이 써서 먹을 수 없었던 이유 때문이다. 그 단어가 곧 상징적인 의미로 발전해서 거역하다, 불순종하다, 불쾌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거역하는 주체의 마음이 상태가 쓴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거역함을 받는 대상에게 쓴 마음을 안겨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나님에게 쓴 마음을 품고 행동함으로, 하나님께 쓴 마음을 안겨주는 것이 곧 거역하는 것이다.

(5) “여호와를 좇으라”“여호와를 좇는다는 것은 히브리어 rj'a(앜하르)의 번역이다. 앜하르라는 동사는 어떤 대상의 뒤에서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좇는다는 것은 곧 여호와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과 그 왕이 다른 대상이 아닌 여호와를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왕이 궁극적인 결정권자이고, 백성은 그 왕만을 보고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왕도 역시 하나의 인간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사무엘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무엘이 사용한 다섯 가지의 동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것은 단지 그 당시의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명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며,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며,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15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열조를 치신 것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사무엘은 다시 두 가지의 동사로서 그의 다섯 가지 동사를 요약하여, 그 동사들을 부정적인 조건으로 제시하여 그 결과를 이스라엘에게 경고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그 명령을 거역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곧 하나님의 손이 이스라엘의 열조를 치신 것처럼 그들도 치시는 것이다. 치신다는 것은 히브리어 바켐의 번역으로 하나님께서 곧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신다는 의미이다. 사무엘이 이 장의 앞부분에서 말한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이 곧 그들의 대적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시는 이스라엘을 잃지 않기 위하여 거룩하게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

16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17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로 밝히 알게 하시리라
사무엘은 이 단계에서 분명하게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스라엘이 왕을 구한 일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큰 죄악을 범한 것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무엘상에 줄기차게 나오는 사상은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오,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을 제쳐두고 인간으로서의 왕을 구한 것은 하나님을 배신한 것이라는 메시지이다. 사울이라는 왕을 세운 뒤, 이스라엘이 먼저 왕을 요구한 것이 하나님께 커다란 죄악이라는 사실을 사무엘은 분명히 지적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사무엘은 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실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밀 베는 때라는 말은 비가 오지 않는 철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밀을 베는 때는 칠칠절 때로서 이때는 건기이며, 좀처럼 비가 오지 않는 철이다. 사무엘은 자기가 천기를 읽어서 비가 올 때를 미리 예상하고 있다가 그 때에 맞추어서 자기가 기도하고, 그리하여 자기의 기도로 인하여 비가 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기 위해서 그 때가 밀 베는 때임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만큼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이다.

18        이에 사무엘이 여호와께 아뢰매
        여호와께서 그 날에 우뢰와 비를 보내시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와 사무엘을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무엘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여호와께서 그 날에 우뢰와 비를 보내셨고, 모든 백성이 여호와와 사무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체험이 아닌 개인의 체험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체험을 하면 좋겠지만, 혹 그런 체험을 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성경을 통하여 그런 체험을 나의 체험으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단지 지식적으로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체험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이다.

19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백성들은 단지 여호와와 사무엘을 두려워하는 감정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범한 죄를 고백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물론 그들의 고백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의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순간적으로 결정하시기만 하면, 그들 모두는 곧 시체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상기하였던 것이다. 자연을 마음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단지 호흡뿐인 인생을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고 하시지 못하시겠는가? 그리하여 그들은 분명히 바른 고백을 하였다. 그들은 단지 왕을 구하는 죄만을 범했다고 고백하지 않았고,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들이 왕을 구한 것이 죄악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고백한 것이다.

20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죄의 고백이 있자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킨다. 죄의 고백이 없는 회복은 없다. 그래서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무엘 앞에서 두려워 떠는 이스라엘에게 먼저 “두려워 말라”라고 안심을 시킨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신 후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길 때,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분으로 인식하게 하신 후에, 우리에게 다시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멀고도 가깝고, 가깝고도 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절대 타자성과 내주하심의 친밀한 사이에 우리는 분명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1.1.1.1.1.1.1. 왕을 구한 죄악을 고백하는 이스라엘에게 사무엘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회복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말하여 준다. 그것은 “여호와를 좇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마음을 다하여 그분만 섬기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 길은 오직 한 가지, 즉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데서 돌이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오직 마음을 다하여 그분만 섬겨야 하는 것이다. 사무엘의 설교는 어떻게 보면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의 회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장 기본적인 계명이 곧 십계명이었고, 십계명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제1계명이 아닌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 20:3). 즉,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신앙하고 따르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따르는 것이다.

21                돌이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좇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사무엘은 긍정적으로는 오직 하나님만을 따르라고 하면서 바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즉, 출애굽기 20:4-6의 말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을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사무엘은 우상이나 이방 신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돌이켜”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rWs(쑤르)의 번역이다.  바른 괘도에서 벗어나서 빗나간 길로 가는데 사용되는 단어이다. 사무엘은 “여호와를 좇는데서 돌이키지 말라”는 것이다. 여호와를 따르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다.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은 곧 우상 혹은 이방 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상의 특징은 유익함을 주지도 못하고, 구원을 주지도 못한다는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따르는 가장 큰 이유는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우상을 섬기는 데에는 윤리적인 요구 사항이 없고, 관능적인 즐거움은 있다.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고, 행복과 번영을 약속해 준다. 사실은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우상이 주는 것은 없는데, 사탄에게 속아서 마치 이런 모든 것이 우상을 섬김으로써 온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가 말한 것을 기억하는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호 2:8).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기 위해 갖다 바치는 은과 금과 곡식과 포도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삶이 그렇게 미련한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우상이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한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한 마디로 우상을 “헛된 것”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헛된 것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WhTo(토후)의 번역이다. 이 단어는 원래 황폐한 불모지인 사막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명이 살 수 없고,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죽음의 땅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상이 아무런 가치 있는 것도 줄 수 없음을 지적하기 위해서 사무엘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단어인 것이다. 사무엘의 어법은 “헛된 것을 좇는 것은 헛된 것이다”와 같은 방식이다. “헛된 것을 좇지 말라, 그것들은 헛되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실상을 보지 못하기에 허상을 보고 따르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 용어에선 색(色)이라고 하였다. 현상계를 의미하는 단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색즉시공” (色卽是空)이라고 하였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은 공허한 것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색즉시공까지는 발견하였지만, 즉 인생의 허무는 발견하였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없기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두려운 것은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다.

22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사무엘은 이제 자기의 고별 설교의 마지막 부분을 말하고 있다. 22절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23절에서는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24-25절에서는 백성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제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악된 모습을 깨닫고 두려워 떨고 있으며, 사무엘은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확신을 주고 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초는 하나님의 선택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이라는 말로써,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당신의 백성을 삼으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선택과 언약의 말씀을 살펴보자.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6절에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에는 두 가지 선행되는 조건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이며, 두 번째는 언약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기뻐하신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신 것은 마지못해서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쁨으로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다.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라는 사무엘의 말도 역시 구약 전체를 통하여 흐르는 구원의 보증에 대한 중요한 구절이 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데스바네아를 통하여 가나안 땅에 진입하기를 거역할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든 이스라엘을 죽이고 모세와 새로운 나라와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때 모세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특히 애굽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제시하신 조건에 반대의 의사를 분명하게 하였다 (민 14:11-16).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 성도의 견인 교리는 우리의 신실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한 것이다.

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세우셨고, 사무엘이 그의 일을 잘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사무엘의 역할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일은 기도와 말씀이다. 이 두 가지가 자고로 주의 종들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임무이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도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하였다. 사도행전 6장 말씀을 보면 그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행 6:5).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언약을 잘 지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이 해야 할 일이 곧 기도와 말씀 교육인 것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사무엘은 자기의 백성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자기의 가장 큰 사명으로 생각하였다. 그 기도를 쉬는 것을 죄라고 인식했다. 주의 종이 그 백성들을 위하여 하는 중보기도를 쉬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사무엘은 선언하는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얼마 되지 않지만,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귀하며, 한 영혼, 한 영혼, 예수님만큼이나 귀한 그 영혼들이 죄악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언약을 잘 지키며 살아가도록 되기 위하여 늘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다. 어림없다. 정말 중보기도의 사명을 되살려야 한다. 사무엘은 백성을 하나님께 이끄는 것을 중보의 기도라고 하였다.

그러면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이 곧 하나님이 뜻을 백성에게로 전달하는 과정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게 하는 것이요, 백성으로 하여금 매일의 삶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도록 그들에게 영혼의 양식으로 살찌우는 작업이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하나님의 선하고 의로운 도로 성도들을 살찌우고 있는가? 너무도 부족하다.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 깨닫게 할 수 있을까에 나의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그러한 일꾼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이 두 가지 일에 나의 모든 신경을 집중하자. 타인의 영혼을 맡은 모든 말씀의 사역자들은 이 두 가지가 가장 기본적인 임무라는 사실을 알고 이 일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24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하나님이 하실 일은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으시는 것이며, 사무엘이 할 일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을 선하고 의로운 도로 가르치는 것이라면, 이스라엘이 할 일은 무엇인가? 사무엘은 그것을 본 절에서 말하고 있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언약을 통하여 그분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이 그분이 그들을 향하여 행하신 큰 일이시다. 또한 그분은 이스라엘을 기뻐하시며,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신다고 약속 하셨다. 이스라엘은 그분이 행하신 그 크신 일을 생각해야만 한다.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바른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바른 태도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회하며,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해야할 단어는 무엇인가? 내 생각에는 “오직”이라는 부사이다. 다른 신이나 우상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그분만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25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자,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의 딜레마가 생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스라엘이 여전히 악을 행하면 그들이 결국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사무엘이 경고를 한 것이다. 이 말씀을 역사적으로 보면, 북왕국 10지파는 결국 망하였다. 또한 남왕국 두 지파도 멸망하였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다시 돌아왔고, 그 후예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셨다. 영적인 교회가 생겼다. 그러면 결국 어떤 말씀이 맞는 것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된 민족 전체를 하나와 같이 다루셨다. 그리하여 그들의 다수를 멸망하게 하셨지만, 결국 그 핵심은 남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연단시키시고, 심판하시고, 다듬으셔서 끝 날까지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더욱이 내가 하나님께 불순종할 각오를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각오를 할 때, 우리는 힘을 얻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1:6). 하나님이 우리에게 끝까지 갈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만을 섬기기로 작정하는 이 시간이 되자.

제 13 장
1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년에
2        이스라엘 사람 삼천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산에 있게 하고
        일천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사울은 9장, 10장, 11장의 세 가지 기사를 통하여 왕이 되었다. 9장에서는 사무엘을 만나서 개인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명하신 것에 근거한 것이었다. 10장에서 사울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왕이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투표와 비슷한 의미가 있었다. 이때 일부의 사람들이 사울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11장에서는 결정적으로 야베스 길르앗 주민들이 암몬의 왕 나하스에게 위기에 빠졌을 때, 사울이 전 이스라엘 군사 33만 명을 이끌고 길르앗 주님을 구원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울과 그를 따른 백성들이 용감하게 전쟁을 치를 결과였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사무엘은 사울과 온 백성을 길갈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사울의 왕권을 새롭게 하여, 백성들이 사울을 왕으로 공식적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였다.

12장은 이제 왕을 세운 사무엘이 정치와 군사에 관한 일반적인 것을 사울에게 물려주며, 고별 연설을 하는 장이었다. 그러나 사무엘 본인이 분명하게 한 것처럼 백성을 위하여 중보기도 하는 일과 그들을 선하고 의로운 도로 가르치는 것은 사무엘의 일이었다.

이제 오늘부터 우리는 사울 왕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왕이 되어가는 지를 공부하게 된다. 이것은 주로 13장과 14장과 15장의 사건에 나타나고 있다. 13장에서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마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4장에서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온 백성에게 잘못된 맹세를 시킴으로써 잘못된 지도자임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는 또한 이 일로 자기의 아들 요나단을 죽일 뻔 하였다. 15장에서는 결정적으로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자기 뜻대로 부분 순종, 부분 불순종하므로 하나님의 마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우리는 사울의 승리뿐만 아니라, 사울의 실패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배워야한다. 승리 후의 실패 가능성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약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한 후, 교만해져서 자신의 강함을 의지하게 되고, 그리하여 실패하게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공식이나 패턴과 같은 것이다.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우리의 온전한 승리의 비결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본문 13장 1절은 원어로도 이미 매우 의미가 모호한 구절이다. 영어 NIV보다는 오히려 한글 개역이 그 의미를 잘 전한 것 같다. 11장 마지막에서 사울이 왕이 된 때가 그의 나이 40세 때요, 이제 13장의 사건이 벌어진 때가 그가 왕으로서 공식적으로 통치한 지 2년이 흐른 때라는 의미의 번역인 것이다. 사울은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강하게 하고자 하는 가장 기본적은 조치로 오늘날의 상비군 비슷한 것을 구성한 것 같다. 그는 백성들을 모집하여 자신에게 2천 명,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천 명의 군사들이 늘 함께 하게 하였다. 어떻게 보면 약 20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한 나라에서 삼천 명의 상비군은 너무나 적은 숫자일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파 공동체이며, 위급한 상황에 들어갔을 때, 11장에서 보았듯이 한 번에 33만 명의 군대를 모을 수 있는 능력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3천 명의 상비군은 최소한의 숫자만을 모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왕을 원했던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다름이 아니라 블레셋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블레셋은 사사 삼손 이후로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효과적으로 압제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계속 그들의 통치 하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사울을 왕으로 선정한 것은 곧 블레셋과 싸워서 이겨 달라는 주문과도 같은 것이었고, 그리하여 사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블레셋과 싸우는 것이었다.

3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아마 사울과의 상의 하에, 아니면 요나단의 단독적인 결정으로 요나단은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자기의 군사들과 함께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즉 게바는 이스라엘 안에 있는 블레셋의 군사기지 같은 곳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전쟁을 선포한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공식적인 도전장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요나단의 이러한 공격은 벌집을 건드린 것과도 같았고, 곧이어 블레셋의 반격이 있을 것을 당연하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요나단의 공격은 당연히 블레셋 전역에 급히 알려졌고, 사울은 블레셋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전국에 나팔을 불어 군사를 소집하였다. 이때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좀더 향토적인 냄새가 나는 단어인 “히브리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4        온 이스라엘이 사울의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가증히 여김이 되었다 함을 듣고
        길갈로 모여 사울을 좇으니라
결과적으로 요나단이 블레셋을 친 것은 사울이 블레셋을 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것은 요나단이 게바의 블레셋 기지를 친 것이 곧 사울의 명령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려주는 근거가 될 수도 있겠다. 이스라엘은 사울이 블레셋을 공격하였고, 결과적으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곧 공격할 것임을 알고,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속속 길갈의 사울에게 집결하였다.

5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여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서 벧아웬 동편 믹마스에 진 치매
그런데 문제는 블레셋의 전력이 객관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보다 훨씬 강하다는데 있다. 블레셋은 이번에 이스라엘을 완전하게 무기력하게 만들어서 다시는 이스라엘로부터 어떠한 군사적인 공격을 받지 않기를 원했기에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전력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섰다. 그들이 동원한 전력을 보면, 병거만도 3만이나 되었고, 그 병거를 모는 마병이 6천이었다. 출애굽 당시 애굽 왕이 홍해 가까이에 있던 이스라엘을 추격할 때 동원했던 병거가 6백승이었던 것을 기억하면, 병거 3만이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블레셋의 보병의 숫자는 해변의 모래 같이 많다고 하였다. 그들은 벧아웬 동편 믹마스에 진을 쳤다. 사울의 군대는 길갈로 모여들었고,

특별 설교

This board is for special day sermons.

  1. No Image

    성경의 파노라마 23 (4/5/06) 제 4-19 과 "사무엘상 (7)"

    성경의 파노라마 제 23 강 (4/5/06) 제 4-19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7) 오늘 공부할 부분은 사무엘상의 마지막 부분으로 사울의 몰락이 나온다. 사무엘상 26, 27, 28, 29, 30, 31장을 다룬다. 제 26 장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다시 사울의 생명...
    Date2006.04.16 By최정인 Reply0
    Read More
  2. No Image

    [re] 성경의 파노라마 23 (4/5/06) 제 4-19 과 "사무엘상 (7)"

    http://www.kccbr.com/data/bible_wed/wed_040506.wma >성경의 파노라마 제 23 강 (4/5/06) >제 4-19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7) >오늘 공부할 부분은 사무엘상의 마지막 부분으로 사울의 몰락이 나온다. 사무엘상 26, 27, 28, 29, 30, 31장을 ...
    Date2006.04.23 Bywebmaster Reply0
    Read More
  3. No Image

    성경의 파노라마 22 (3/29/06) 제 4-18 과 "사무엘상 (6)"

    성경의 파노라마 제 22 강 (3/29/06) 제 4-18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6)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사울의 통치 말기와 다윗의 방황기에 관한 부분으로 사무엘상 19, 20, 21, 22, 23장을 이룬다. 제 19 장 1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Date2006.04.02 By최정인 Reply0
    Read More
  4. No Image

    [re] 성경의 파노라마 22 (3/29/06) 제 4-18 과 "사무엘상 (6)"

    http://www.kccbr.com/data/bible_wed/wed_032906.wma >성경의 파노라마 제 22 강 (3/29/06) >제 4-18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6) >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사울의 통치 말기와 다윗의 방황기에 관한 부분으로 사무엘상 19, 20, 21, 22, 2...
    Date2006.04.04 Bywebmaster Reply0
    Read More
  5. No Image

    성경의 파노라마 21 (3/22/06) 제 4-17 과 "사무엘상 (5)"

    http://www.kccbr.com/data/bible_wed/wed_032206.wma성경의 파노라마 제 21 강 (3/22/06) 제 4-17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5)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사울의 통치 중기에 관한 부분으로 사무엘상 15, 16, 17, 18, 19장을 이룬다. 제 15 장...
    Date2006.03.22 By최정인 Reply0
    Read More
  6. No Image

    성경의 파노라마 20 (3/15/06) 제 4-16 과 "사무엘상 (4)"

    http://www.kccbr.com/data/bible_wed/wed_031506.wma성경의 파노라마 제 20 강 (3/15/06) 제 4-16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4)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사울의 통치 전반(前半)에 관한 부분으로 사무엘상 11, 12, 13, 14장을 이룬다. 제 11 ...
    Date2006.03.19 By최정인 Reply0
    Read More
  7. No Image

    성경의 파노라마 19 (3/8/06) 제 4-15 과 "사무엘상 (3)"

    성경의 파노라마 제 19 강 (3/8/06) 제 4-15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3)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사물엘의 통치와 사울이 왕으로 세움을 입는 내용으로 사무엘상 7, 8, 9, 10장이다. 사무엘상의 첫 몇 장은 이스라엘의 지도력이 엘리 제사장...
    Date2006.03.12 By최정인 Reply0
    Read More
  8. No Image

    성경의 파노라마 18 (3/1/06) 제 4-14 과 "사무엘상 (2)"

    성경의 파노라마 제 18 강 (3/1/06) 제 4-14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2)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은 언약궤의 행로이다. 사무엘상 4, 5, 6장에 이르는 이 부분은 쉽게 간과되기 쉬우나 우리에게 중요하고도 많은 영적인 교훈을 전달해 주고 있...
    Date2006.03.02 By최정인 Reply0
    Read More
  9. No Image

    [re] 성경의 파노라마 18 (3/1/06) 제 4-14 과 "사무엘상 (2)"

    http://www.kccbr.com/data/bible_wed/wed_0301.wma >성경의 파노라마 제 18 강 (3/1/06) >제 4-14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2) >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은 언약궤의 행로이다. 사무엘상 4, 5, 6장에 이르는 이 부분은 쉽게 간과되기 쉬우나 ...
    Date2006.03.11 Bywebmaster Reply0
    Read More
  10. No Image

    성경의 파노라마 17 (2/22/06) 제 4-13 과 "사무엘상 (1)"

    성경의 파노라마 제 17 강 (2/22/06) 제 4-13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1) 오늘부터 우리는 사무엘상에 대하여 공부한다.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원래 한 권이었던 것을 주전 250년경 헬라어로 번역할 때, 양을 감안해서 상...
    Date2006.02.26 By최정인 Reply0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 55 Next
/ 5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