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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파노라마 제 19 강 (3/8/06)
제 4-15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3)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사물엘의 통치와 사울이 왕으로 세움을 입는 내용으로 사무엘상 7, 8, 9, 10장이다. 사무엘상의 첫 몇 장은 이스라엘의 지도력이 엘리 제사장에게서 사무엘로 넘어가는 과정을 주의 깊게 묘사하고 있다. 엘리와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철저한 몰락과 함께 언약궤는 블레셋에 빼앗긴 것도 다루고 있다. 블레셋으로 간 언약궤는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블레셋에 보이고 벧세메스로 돌아왔다. 비록 벧세메스 주민들이 제사장의 성읍 주민들이었지만, 하나님께 드려야할 마땅한 공경을 드리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 그리하여 기럇아르바로 언약궤는 왔다. 왜 언약궤가 실로로 가지 않았는지는 분명한 설명이 나와 있지 않다. 다만 고고학적 증거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엘리 가문의 철저한 몰락과 함께 실로도 블레셋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된 것으로 여겨진다. 사무엘도 그의 지도자로서의 일을 실로에서 보지 않고, 그의 고향인 라마를 중심으로 해서 본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사무엘상 7:1-2를 보자.
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기럇여아림은 유다와 베냐민의 변방에 있는 유다의 성읍이다. 기브온 족속이 거짓으로 여호수아에게 투항하여 살아남은 기브온 족속들의 네 성읍 중 하나가 바로 기럇여아림이다. 그 뜻은 “산성”이이다.

기럇여아림 주민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들여 놓았다는 것은 기럇여아림에 레위의 고핫 자손들의 살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들은 여호와의 언약궤가 심지어 제사장이라고 해도 함부로 언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언약궤를 지키게 하였다. 엘리아살은 제사장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로써 기럇여아림은 그 궤를 20년 동안이나 지키는 거룩한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아마 이 20년 동안 성막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언약궤만 엘리아살의 집에 보관하는 정도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궤는 나중에 다윗이 정권을 잡았을 당시인 사무엘하 6장에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에 안착된다. 다윗은 성전 지을 준비를 하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성전 안에 언약궤를 넣도록 한다.

이제 7장 2절 마지막에 보면 온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사모하였다고 하였다. 즉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안락할 때,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기 어렵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을 사모한다.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매어 달리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나, 이삭을 얻었을 때, 너무나 행복했고, 그때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십수 년씩 나오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급기야는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이 있으셨고, 그리하여 다시 아브라함은 이삭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복을 빌고 복을 얻으면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복으로 돌리고, 하나님을 사모하기를 멈춘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복을 다시 취해가시는 이유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던 것이다.

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스라엘이 이렇게 갈급하게 하나님을 찾을 때, 사무엘이 다시 전면에 등장한다. 3절에 보면 사무엘이 전 이스라엘에게 말을 한다. 아마도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전 이스라엘에 전갈을 보내었던지, 아니면 어떤 예비 모임 같은데서 이러한 말을 한 것이다. 이 본문은 “미스바의 부흥”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가 미스바의 부흥이 일어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사무엘은 먼저 이렇게 말한다. 사무엘이 전한 전갈 혹은 그의 메시지는 네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1)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 말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라는 말씀을 댓구로 받은 것이다. 즉 여호와를 사모하는 것은 곧 여호와께 돌아오고자 심령이 갈급한 것을 의미한다. 심령이 가난한 것을 말한다. 외부적 환경이 어떠하든 간에,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간섭하심을 간절하게 바라는 상황이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곧 회개이다. 사무엘은 계속한다.
        (2)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은 이방신들과 아스다롯과 우상들을 섬기면서 올 수 없다. 자기 몸에 붙어 있는 장신구를 포함해서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을 제하지 않고는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죄는 우상 숭배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문제는 이방신들을 제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서서히 제거하면서 하나님을 믿어야지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몸에 인습처럼 붙어있는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으면 않을수록, 우리 삶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임재할 것이라는 착각을 금해야 할 것이다. 사무엘이 요구한 것은 온전한 믿음이었다.
        (3)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고 그만 섬기라”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마음”이라는 단어와 “그만”이라는 단어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마음의 문제요, 또한 배타적인 문제이다. 속으로는 우상을 섬기며,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할 수 없다. 또한 우상을 섬기며 동시에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것은 곧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4)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스라엘에게는 블레셋이라는 위협이 실존하고 있었다. 아니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블레셋이라는 대적을 허락하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갈급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심령이 가난하도록 만드셨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셔서 블레셋을 물리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왔던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이스라엘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만 향하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우상에게 빼앗기기를 원치 아니하신다. 그래서 그들에게 블레셋을 주시고, 고통을 주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기적이 일어났다. 사무엘의 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한 것이다.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변하면, 백성들이 따르는 것이 곧 부흥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상을 제하고 하나님을 섬긴 것을 제함과 섬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우상을 제하고 하나님만을 섬긴 것은 신약의 믿음에서도 동일한 것이다.

5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이제 사무엘은 온 민족적인 부흥의 때가 도래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전갈하여서 미스바로 모이게 했다. 미스바는 베냐민 지파에 있는 미스베 (수 18:26)과 동일한 곳이다. 예루살렘 북쪽 11km 정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미스바는 “망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사무엘은 백성들을 주로 미스바로 불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렸다. 미스바는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영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던 것이다. 주로 예배와 기도를 위하여 백성들이 모인 곳이다.

그냥 집에서 기도해도 될 터인데 왜 백성들에게 모이라고 하였을까? 모일 때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모여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강함을 체험하게 된다.

사무엘은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하기를 원했다. 사무엘은 자기의 가장 중요한 임무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그리하여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였다. 특이한 것은 여기에서 사무엘의 인도로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부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매우 희귀한 사건으로 오직 여기에만 기록된 것이다. 아마 회개를 상징하는 행위인 것 같다. 어찌되었던 간에 물의 중요성은 성경에서나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모인 백성들이 한 고백은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는 것이다. 즉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 것을 회개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불성실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을 고백한 것이다. 회개 없는 부흥 없다. 모든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는 회개가 일어난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빈 마음, 정결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웠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채웠다는 것이다.

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그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듣고
        블레셋 사람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영적인 부흥을 위하여 미스바에 모였는데, 블레셋 사람들은 이것을 듣고 그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다. 블레셋의 침공을 받지 않고 블레셋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당면 과제인 이스라엘에게 블레셋의 침공이라는 문제가 다시 발생한 것이다.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모였는데, 그 모임이 다시 문제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해결책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공연히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불러 모아서 블레셋의 심기를 건드려 놓았고, 그리하여 블레셋의 대대적인 침공이 생긴 것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이것이 바로 사탄의 공격인 줄 알든, 모르든 간에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 모임을 갖지 않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이것은 계속적으로 사탄의 압제 아래서 살자, 애굽이 좋사오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이에 대하여 무지 몽매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어떠한가? 그 사실을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두려운 상황을 허락하시는가? 그것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다. 두려운 상황이 닥쳐올 때, 우리는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우리의 믿음을 사용해야 한다. 두려워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면, 두려운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부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려운 가운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였는가?

8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이스라엘에게는 사무엘이라는 지도자가 있었다. 그들은 사무엘에게 중보의 기도를 요청하였다.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않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중보 기도를 요청한 것이다. 영적인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그에게 맡겨진 양 무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사무엘은 즉각적으로 행동을 하엿다. 그는 먼저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했다. 그리고 그 양으로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다. 즉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예배를 드린 것이다. 온전한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물론 이 예배는 사무엘 혼자서 드린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드린 것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효과적으로 인도하였고, 그들은 두려움을 헤치고, 사무엘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며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기도할 거리를 주시는가? 당연한 말 같지만, 기도하라고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거리가 없으면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기도할 거리가 없는 때는 어느 때도 없다. 중요한 것은 기도할 거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결국은 문제 가운데 파묻혀서 나중에는 기도할 기력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상황이 되기 이전에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개인의 문제와 가정의 문제와 목장의 문제와 교회의 문제와 지역 공동체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그때에 각 개인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인 임무와 사명을 다 할 수 있게 된다.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사무엘이 번제를 드리고, 기도를 하는 사이에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이스라엘이 모여 있던 미스바로 가까이 접근하여 들어왔다. 마치 광야로 나선 이스라엘에게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는 애굽의 병거 부대가 따라 붙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확하신 시간에 움직이시는 것을 보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셨다. 그 우레를 이용하사 그들을 어지럽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다. 하나님은 이렇게 가끔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신다. 어떤 때에는 이스라엘이 용맹스럽게 나아가야 하지만, 어떤 때는 천지의 기상을 이용하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모였던 이유는 영적인 부흥 즉, 이방신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서였다. 더 나아가서 여호와를 사모함으로 블레셋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모였던 것이다. 그러니만큼 무장을 하고 모인 것이 아니었다. 남녀노소가 섞여 있을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블레셋의 침공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이 패망할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사무엘과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여호와께 매달려 예배와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적들을 물리치신 것이다. 회개와 믿음과 예배와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시게 하는 놀라운 바탕이 된다. 이스라엘이 이방 신을 버리고 여호와만을 섬기고, 여호와만을 사모하였을 때, 하나님은 역사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진정한 믿음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된다.

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을 따라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이제 영적이 부흥뿐만 아니라 블레셋의 당면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위기가 곧 기회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두려워했던 상황에서 승리의 상황으로 반전된 것이다. 사사기의 삼손 시대에 블레셋의 지배를 받아온 때로부터 처음으로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격파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가 영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바르게 서느냐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방신을 제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만을 사모할 때, 우리에게 문제로 보이는 것이 오히려 문제해결의 기회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사무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싶었다. 백성들이 오늘의 놀라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돌을 취하였다. 흐르는 물이 아니라 바위를 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돌을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웠다. 하나님의 인도하신 현장에 돌을 세운 것이다. 마치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이 요단 강 바닥에서 돌 열둘을 가져다가 기념으로 비를 세웠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사무엘은 그 돌 이름을 “도움의 돌” 즉 에벤에셀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너무나 좋아한다. 여러분이 믿을지 믿지 않을지 잘 모르지만, 현재 우리 모두의 지금의 모습은 바로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신 결과이다. “나의 나 된 것은 여호와의 은혜이다”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나의 나 된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에벤에셀은 하나님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나를 도우신 것을 입증하는 돌이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면 지금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마 1:23).

그러면 우리의 앞날은 어떠한가? 우리가 미래를 향하여 걸어갈 때,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안에 놓여있다. 우리가 미래라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도 인도하신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오르게 하시는 하나님은 산 저쪽 편에서 양을 데리시고 올라오시는 것이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길을 갈 때에 우리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는 에벤에셀의 하나님, 현재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현재부터 미래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감사드리자.

13        이에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에그론이나 가드나 다 블레셋의 다섯 도시에 속하는 것들이다. 즉 블레셋이 자기들의 영토의 경계지점까지 쫓겨 간 것이다. 이로 인하여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이스라엘의 영토가 회복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모리 사람들과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복도 허락하셨다. 이스라엘의 회개와 예배와 기도와 믿음이 회복과 수복과 평화의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사무엘이라는 지도자와 그 지도자를 잘 따르던 백성들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우리에게도 역시 회복과 수복과 평화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힘써서 주님을 따르자.

15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사무엘은 부지런한 지도자였다. 그는 자기가 한 곳에 머물러서 백성들을 오라고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순회하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다니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며, 백성들을 재판하며, 그들을 가르쳤다. 재판에서 공의로 가르치는 것은 곧 율법을 잘 가르치는 놀라운 기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사무엘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는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17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 자기 집이 있음이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라마에는 사무엘의 집이 있었다. 거기서도 가르쳤고,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 아직 여호와의 궤는 기럇여아림에 있었고, 실로 성소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사무엘은 라마를 중심으로 가르쳤으며, 제사를 위한 단은 여호와의 언약궤가 있는 기럇여아림이 아니라 라마에 있었다. 이로 보건데 다윗이 예루살렘에 언약궤를 안치하고,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전까지는 제사를 통한 이스라엘의 종교는 많은 면에서 안정이 되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기럇여아림에 있던 여호와의 언약궤는 전쟁의 상황에서는 다시 전쟁터로 나갔다. 이것은 사울의 시대나, 다윗의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제 8 장
1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2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벌써 사무엘이 늙어 일선에서 물러나야할 때가 가까웠다. 에벤에셀의 빛나는 승리를 뒤로한 채 사무엘은 정치 일선에서 은퇴하고 그의 두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았다. 여기에 사사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 비록 사무엘상 8장에 가까이 이르렀지만,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은 아직 왕정시대가 아니고 사사시대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엘리나 사무엘도 다 사사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사사시대와 왕정시대를 여는 중요한 과도기적 시대의 인물이었다.

사실 사무엘은 사울을 세워 왕으로 세웠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을 때에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서의 비전을 갖고 훈련을 받게 하셨다. 물론 사무엘은 다윗이 왕으로 백성들로부터 기름을 붓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사무엘이 죽을 때에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이 극도로 혼란스러울 때였다. 사울은 밖으로 블레셋의 공격에 시달리고, 안으로는 자기보다 인기 좋은 다윗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쫓아다니던 때였다.

3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사무엘은 자기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았다. 언제 사무엘이 결혼을 하고, 사무엘의 아내의 이름은 무엇인가? 성경은 간혹 이러한 방식으로 기록된다. 비록 사무엘이라 하여도 그의 결혼과 그의 아내의 이름 등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과감히 생략하는 것이다. 사무엘이 아내가 몇이었든지, 그에게 이 두 아들 외에는 자녀가 없었는지도 잘 모른다. 그러나 기드온이 아들들만 70명을 두었고, 또 첩을 취하였던 것과 같은 그러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상상이 되지는 않는다.

엘리에게 있어서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엘리의 뒤를 이어서 제사장이 되었던 것과 비슷하게 사무엘에게도 요엘과 아비야라는 두 아들이 있었고, 사무엘도 그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았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온갖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든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엘리 제사장이 그것을 중지시키지 못함으로 인해서 그의 가정과 나아가는 나라 전체에도 극심한 심판의 회오리가 불어왔었다. 결과적으로 엘리 가문이 아닌 사무엘이라는 새로운 지도자가 이스라엘의 영적, 정치적, 군사적 지도를 맡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도 인간이요, 때가 되어서 늙어서 그가 하던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음을 판단하고 그의 아들들을 사사로 삼았던 것이다.

문제는 사무엘의 아들들이 아버지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럴까? 왜 사무엘의 가정의 이야기는 자세히 나오지 않을까?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가정의 테두리를 떠나서 엘리의 아래서 자라났다. 그에게 보이는 가정은 역기능적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가정뿐이었다. 그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잘 보여 주었어야할 사람들, 예를 들어 엘가나, 엘리, 홉니, 비느하스 등은 모두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잘 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사람은 배운 대로 보고 자란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들의 자녀들에게는 역할 모델이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사무엘은 훌륭한 아버지로서의 역할 모델을 잘 보지 못하고 자라났으며, 그러한 그가 자기의 아들을 잘 기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기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자녀들을 길렀기 때문에, 자기의 아들들이 사사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고 그들을 브엘세바에서 사사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였다. 그들의 역할은 단지 한 지파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었다. 사무엘은 이제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 즉 백성들에게 선하고 의로운 도로 가르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만을 전념하기로 마음속에 작정하였을 터였다.

요엘과 아비야는 이득을 보고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였다고 하였다. 즉 자기들의 맡은 일을 자기들의 사사로운 재물을 쌓는 자리로 알았던 것이다.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신 16:19).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들도 이렇게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고, 축재를 하는 것을 보아서 사람에게 있어서 물질의 욕심이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자녀 문제는 가장 기도해야 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엘리 제사장이 늙어서 홉니와 비느하스를 통제할 수 없었던 것처럼, 분별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사무엘도 자기 자녀에게 대한 분별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자녀에 대한 문제에는 너무나 약한 사람들이 있다. 나이가 들면, 자녀에 대하여 집착하고,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지도자들은 나이가 들어서 분별력을 잃기 이전에 젊은 지도자를 세워놓고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은 이제는 참지 않았다. 홉니와 비느하스 때에는 엘리의 권위에 눌려서인지 그들의 모든 악행에도 불구하고 엘리에게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처음으로 이긴 후에 다시 문제가 많은 지도자들에게 자기들의 장래를 맡긴다는 것이 너무나 불안했다. 그래서 그들은 라마에 있는 사무엘을 찾아갔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한 요구, 그렇지만 강력한 요구를 사무엘에게 한다. 그들의 논리는 “(1) 당신 사무엘은 늙었다. 즉 더 이상 전쟁터를 우리와 함께 나갈 수 있지 못할 것이다. (2)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이스라엘의 사사, 즉 지도자로서 자격을 상실하였다. (3) 그러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 달라. 다른 나라들은 왕을 세워서 그 왕이 백성들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서 외적과 싸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하지 못하다. 그러니 적당한 왕을 세워 달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논리에 무엇이 문제인가? 이들은 사무엘과 상의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요구 사항을 가지고 그 요구 사항을 관철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 모든 것의 결정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성과 경험의 판단에 자기들의 모든 미래를 내걸었다. 상황을 보니 사무엘도 못 믿고, 사무엘의 아들들도 믿지 못하겠다. 그런데 우리의 경험 상 이웃 나라들을 보니 왕이 없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우리나라만 왕이 없다. 왜 우리만 왕이 없어야 하는가? 우리에게도 왕을 달라. 얼마나 강력하고 이성적인 판단처럼 들리는가?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의 나라와 동일하게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신데, 세상 나라와 같이 왕을 세우려고 한 것이다. 오늘 당장 필요한 것을 택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들의 뜻대로 하기를 원한 것이다.

신명기 17장 14절 이하를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서 그 땅을 얻어 거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열국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우리라는 뜻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신 17:14-15). 즉 하나님도 어느 때가 되면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할 것을 아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때를 결정한 것이다.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사무엘은 상황이 매우 심각한 것을 깨달았다. 그도 자기가 늙은 것과 자기의 자녀들이 이스라엘의 사사로서의 역할을 바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백성의 지도자들이 사무엘에게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지 상의하는 태도나,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지를 기도해 주기를 청원하는 태도가 아니라, 답을 가지고 와서 무조건 요구하는 그 상황에 대하여 절대로 기뻐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어떠한 답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가능하면 우리의 답을 무조건 관철시키려하기보다는 함께 상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도 어느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태도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참으로 따르기 어려운 말씀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피할 길을 내어 주신다는 약속을 가지고 있는 말씀이다. 사무엘이 이 상황 가운데서 기도한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점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때때로 성급한 결정을 하여 모든 일을 망쳐 놓기도 한다. 즉각적인 반응과 즉각적인 대답으로 주워 담지 못할 말을 하고, 더 나아가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 대한 즉각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무리들을 만나셨을 때, 땅에 구부려 무엇인가를 쓰시는 시간을 가지셨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 정도의 시간을 갖지도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신다.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백성들의 말이 옳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기에 백성들의 요구를 응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차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들으시는 때도 있다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라고 해서 항상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함에 있어서 순수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지, 우리의 욕심을 구하고, 그 욕심대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 욕심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 욕심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의 태도가 잘 되어 있는지 늘 점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라는 말은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상당한 실망과 서운함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분명히 아심을 나타내 보여준다. 사무엘은 지금까지 아들들을 사사로 세운 것을 실패한 것을 제외하고는 곤경에 빠진 이스라엘을 성공적으로 인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다스리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함으로 영적인 지도자와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비록 자기 아들들이 사사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지는 못했지만, 사무엘의 지도력이 있었기에 왕이 없어도 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더욱이 인간의 세운 왕이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잘못된 길로 갈 가능성에 대하여 사무엘은 이미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요지는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하는 이면에는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오늘 분문의 핵심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래의 뜻은 이스라엘에게 절대로 왕의 제도를 주시지 않으시려는 것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왕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왕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왕이심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왕을 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대신에 지도를 받는 백성들이 자기들의 마음껏 지도자를 뽑는 시대이다. 이렇게 대통령도 뽑고, 국회의원도 뽑고, 크고 작은 지도자들을 뽑는 시대이다. 지도를 받는 사람들이 뽑았기에, 어느 때고 그들이 다시 모여서 불신임을 하면 그 지도자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떠한가? 하나님은 우리가 투표해서 뽑은 대통령인가? 아니면 왕이신가? 신약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들 중의 하나인 “하나님의 나라”가 사실을 그 용어부터 한글로 번역될 때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읽은 기억이 난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헬라원어가 나라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왕국을 의미하는 “바실레이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다. 하나님은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이면에 왕이신 하나님을 배격하고 인간을 왕으로 뽑아서 그 왕의 지도를 받고 싶어 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市民)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의 신민(臣民)이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하나님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 왕을 요구하는 것을 동일 선상에 놓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과 다른 신이 양립될 수 없듯이, 하나님과 왕도 양립될 수 없다는 정도까지 이해될 수 있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그분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하여 극심하게 경계하신다. 그만큼 하나님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 사무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 따르게 하는 사무엘을 버리는 것이 곧 그들의 불신을 잘 나타내는 것임을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여 주신다. 하물며 나도 버렸는데, 너도 버릴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아무런 인간적인 지도자가 없는 그런 상태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왕정을 도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에 대한 말씀이지, 어떠한 형태로든 지도자로서 백성을 섬기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은 두 사람 이상만 모이면 분명히 지도자가 필요하다. 지도자는 먼저 하나님의 지도력 아래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지도를 받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도자는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지도자는 지도자로서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한 경계와 함께 왕의 제도를 알려 주라고 하신다. 왕의 제도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모든 역기능을 알려 주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분명히 이 사실을 아는 상태에서 왕 제도를 도입하라는 것이다. 본문의 문제는 우리의 매일의 문제와도 같다. 결국 우리의 왕의 문제이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느냐 아니면 나의 경험과 이성과 판단을 왕으로 삼느냐는 것의 문제이다.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내가 왕이냐, 하나님께서 왕이시냐이다.

10        사무엘이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일러
11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 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사무엘은 9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엄히 경계하고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고 하신 대로 이제 11절부터 여호와의 모든 말씀으로 왕의 제도를 설명한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본문은 왕의 제도에 대한 부정적인 면, 혹은 경계점을 중심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무엘도 왕의 제도에 있어서 먼저 지적하고 있는 것이 왕이 백성들의 아들들을 군사로 징발할 것이라는 점이다. 즉, 왕이 없을 때에는 상비군이 없이 모든 백성들이 평소에는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농사를 짓다가, 전쟁 시에는 나팔 소리를 듣고 전쟁에 나가는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신 사사가 일어나서 전쟁의 마당에서 백성의 앞에서 전쟁을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왕의 제도가 생기면, 왕은 미리 백성들의 젊고 건장한 아들들을 선택하여 상비군을 만들게 된다.

사무엘상 13:2에 보면, 사울이 왕이 된 지 2년에 “이스라엘 삼천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산에 있게 하고 일천은 요나단과 함께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상비군인 것이다. 사무엘은 상비군이 할 일은 왕의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할 것과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동안 성경에서 보았듯이 말과 병거는 교통수단이 아니라 전쟁 수단 즉 전쟁무기이다. 신명기 17:14-17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논한 제왕학이 나온다. 여기서 모세는 (1) 자국민으로 왕을 세우라 (2) 왕은 말을 많이 두지 말라 (3) 아내를 많이 두어서 마음이 미혹되지 말라 (4)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라는 경계를 한다. 특히 16에서는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기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게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라는 말씀이 나온다. 사실 모세 이후에 여호수아와 사사들과 사울과 다윗은 말과 병거를 소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혹시 전쟁에서 말을 노획하면 그 모든 말의 발목 힘줄을 끊고, 병거를 불살랐다 (수 11:9 여호수아가 가나안 북부 지방의 연합군을 섬멸하고 발의 발목 힘줄을 끊고 병거를 불살랐음; 삿 4:15에는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의 철병거 900승을 기손 강의 진흙 구덩이로 유인하여 철저하게 섬멸시킴). 신명기 17:16절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한 것이다.

말과 병거를 최초로 소유한 사람은 압살롬이었다. 그술에서 돌아온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모반하고 왕이 될 목적으로 말과 병거를 외국으로부터 모으기 시작하였다 (삼하 15:1에는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분비하고 전배 50명을 세웠다고 하였다). 다윗은 이것을 철저하게 알았어야 했을 것이지만, 다윗은 그 자녀 문제에 있어서는 언제나 유약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결국 다윗은 요나단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쓰라린 체험을 하게 되었다.

말을 최대한 많이 모은 사람은 솔로몬 왕이었다. 열왕기상 10:26, 28-29에 보면 솔로몬은 병거가 1400승, 마병이 12000명이었다. 주로 애굽에 상인들을 보내어 사 올린 것이었는데, 병거 한 승에 600 세겔, 말은 한 마리에 150세겔이었다. 솔로몬은 또한 말들을 인근 국가의 왕들에게 다시 팔기도 하였다. 이렇게 볼 때에 솔로몬은 신명기 17:16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왕인 것이다.

지금 사무엘은 이렇게 왕들은 결국은 말과 병거를 소유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말들과 병거를 몰 군인들과 또한 도보로 나가서 병거보다도 더 빨리 달려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들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대비한 상비군은 결국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공격군이나 침략군이 되기도 한다.

12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천부장, 오십부장 등은 군대의 조직을 다스릴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등이 지도자들이 오늘날에도 있듯이 사무엘도 먼저 그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조직이 없으면 군대가 바로 서지 못한다. 백성의 아들들이 자기의 기업에서 자기 생업에 전념하지 못하고 왕에게 고용되어 군인들을 다스릴 일을 하게 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사무엘은 왕이 왕궁의 밭을 갈고 추수를 하는 등 농사일을 백성의 아들들에게 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그 아들들이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서 농사에 전념하고 양을 쳐야 하는데, 왕궁을 먹여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사무엘이 말하는 것은 왕이 백성의 아들들에게 각종 군사 무기, 즉 칼이나 활을 만들게 하고, 병거에 사용될 각종 제구들을 만드는 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상비군들이나 그들을 돕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들인 것이다. 지금 사무엘이 말하고 있는 바는 백성들에게 분명한 경계를 주는 것이다. 왕이 생기면 그 왕이 너희의 아들들을 취해갈 것이다 라는 내용이다.

13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단지 백성의 아들들만을 택하여 상비군으로 삼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왕은 백성의 딸들을 취하여 각종, 향료, 요리, 음식을 만들도록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야 할 아들들뿐만 아니라 딸들도 징발되어 왕궁과 상비군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분명한 경계가 된다.

14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아들들과 딸들을 취할뿐더러 이제는 각 백성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 지켜온 기업이 되는 밭, 포도원, 감람원의 가장 좋은 것을 왕이 취할 것이라고 경계한다. 왕이 이렇게 백성들로부터 토지를 징발하는 것은 자기 신하들에게 봉작으로 주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왕이 빼앗는 무서운 결과가 빚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생각에는 전쟁이 나서 외적이 침입하면 자녀들도 죽고, 자신들도 죽고, 토지와 그 소산물을 빼앗기게 될 것이므로, 미리 왕을 세워서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가득하였기에 사무엘의 이런 경계가 당연한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15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십일조는 레위인들과 제사장에게 내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왕성하게 돕도록 하는 것인데, 나라에도 또한 곡식과 포도원의 소산의 십일조를 내야 할 것이라고 사무엘이 경고한 것이다. 결국 국가에 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 십일조는 세금의 의미가 있고, 국민에게 납세의 의무가 있음을 사무엘이 지적하는 것이다.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하면 왕의 제도가 없었기에 지금까지는 이러한 세금의 제도가 없었다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다.

16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우리 말 성경은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영어 NIV는 “남종들과 여종들”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남녀종들과 나귀가 함께 언급된 것은 이들이 백성들의 매일의 삶에서 요긴하게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17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또한 사무엘은 왕이 양떼의 십분의 일을 취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결론적으로 왕과 백성과의 관계가 주종관계가 될 것이라고 경계하였다. 하나님을 오직 왕으로 섬기며, 그 분만이 왕이시라고 고백하며 살아야 하는데, 이제 왕의 제도가 생기면, 백성들이 왕의 종이 될 것이라고 경계한다. 아들들을 징발당하고, 딸들을 징발당하고, 토지를 징발당하고, 토지 소산물의 십일조를 징발당하고, 양떼의 십일조를 징발 당하게 되면, 결국 왕과 백성의 관계는 포악한 주인과 고통당하는 종의 관계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18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사무엘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제 너희가 왕을 달라고 기도하지만, 어느 날인가는 왕을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그 왕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게 될 것이며, 그러나 그렇게 하여도 하나님의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계하는 것이다.

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사사 제도와 왕 제도의 가장 다른 점은 사사는 필요할 때에만 하나님이 세우시지만, 왕은 세습된다는 점이다. 왕의 자리가 세습되면, 백성들은 이제 왕을 뽑는데 드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아도 되며, 그리하여 왕은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은 왕을 섬기며, 왕이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돌보아 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사무엘은 오히려 왕이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지게 할 것이라고 경계하고, 백성들은 그러한 사무엘의 경계를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사무엘과 백성들은 서로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시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서로에게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즉 사무엘은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말을 해도, 백성들이 인간으로서의 왕이 당연히 필요하며,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점이 그들에게 커다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왕시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마음속과 안중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전혀 없음을 또한 드러내었다.

대신에 백성들의 생각과 철학은 “우리도 열방과 같이 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나라도 세상 나라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하지만, 세상에 나가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힘과 수단과 방법으로 세상 사람과 똑같이 하고서 주일에 와서는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은 안식하라고 명하셨는데, 안식하지 않고, 주일에도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들어서 일을 하고,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셨는데, 이 또한 여러 가지 핑계와 이유로 드리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세금의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정직하게 내고 있는가? 사업을 할 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 얼마나 정직하게 경쟁을 하는가?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세상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라고 말씀하셨다.

21        사무엘이 백성의 모든 말을 듣고
        여호와께 고하매
22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
지금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의 장로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이 대화는 일시적이 것이 아니고, 대화 중에 사무엘은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6절;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21절; 사무엘이 백성의 모든 말을 듣고 여호와께 고하매). 하나님께서도 매번 사무엘에게 답하여 주신다 (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도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22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즉 사무엘은 백성의 장로들이 찾아와서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를 하는 대화를 나눌 때에 스스로 결정하여 판단하기보다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 응답을 받아서 그 응답을 전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제안을 들을 때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기가 쉽다. 그러나 그런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대답하지 않는 자세를 갖는 것이 바르다고 할 정도로 기도를 늘 드리는 순종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물론 기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지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늘 기도하는 자세로 모든 일에 대응해야할 것이다.

제 9 장
1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라
        베냐민 사람이더라
2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
이제 사무엘상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간다. 즉 사무엘상은 엘리, 사무엘, 사울, 다윗의 네 인물을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는바, 여기 9장부터는 사울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무엘의 이야기에서 사울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부분에서 중심 되는 주제가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이방과 같이 자기들에게도 왕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내용이다. 그 내용이 8장을 구성한다.

이제 9장에서 사울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도입으로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사람인 기스(Kish)의 아들이었다. 기스는 유력한 사람 즉 “끼뽀르 하일”이었다. “유력한 사람”이라는 말은 룻기 2장에서 보아스를 묘사할 때도 사용되었던 말이다. 일정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인격적으로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존경을 받는 유지를 사용하는 말이다. 결국 기스가 유력한 자라는 뜻은 그의 아들인 사울이 베냐민 지파에서 유력한 집안 출신의 자제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무엘상의 저자는 직접적으로 기스의 아들인 사울에 대하여 소개한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희망’이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 그가 이스라엘 민족의 희망이 되었던 것을 상기할 수 있게 하는 말이다. 바울 사도가 이방으로 선교하러 가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이름이 사울이라는 점도 기억해둘만하다. 사울은 이미 유력한 집안의 자제라는 소개가 되어 있었고, 이제 그의 외적인 용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사울은 “준수한 소년”이었다. 준수한 소년이란 “빠후르 하토브”라는 원어를 해석한 것으로 “토브”라는 단어는 “good" 혹은 “beautiful”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남자답게, 잘 생긴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의 준수함은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게 큰 키도 한 몫을 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 어깨부터 머리까지의 크기만큼 정도 더 컸던 사람이었다. 사울이 얼마나 준수했으면, 이스라엘에 그보다 더 준수한 사람이 없다고 했을까? 이런 표현은 문학적인 표현이므로, 그가 이스라엘 모든 남자를 세워 놓고 누가 가장 잘 생기고 준수하였는지를 객관적으로 조사해본 결과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사무엘상 저자는 사울이 그 시대에 그런 평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핸섬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강점이 곧 그 사람을 죽이는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오히려 한 사람의 약점이 그를 살리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역설은 우리의 삶에서 그대로 연결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울은 약할 때 강함 주시는 하나님을 전파했다. 우리가 약함을 알고, 그 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이다 (고후 12:10).

3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4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니되 없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니라
여기부터 우연한 일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우연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필연이다. 기스는 어떤 연유인지 그의 암나귀들을 잃었다. 한글 성경은 암나귀들이라고 번역했지만, 원어를 고려한다면 나귀들로 번역되는 것이 더 맞다. 기스는 그의 아들 사울에게 한 사환을 데리고 잃어버린 나귀들을 찾아오라고 말한다. 사울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여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나귀들을 찾아 한 사환과 함께 길을 떠난다. 사울이 나귀를 찾아 배회한 지역은 그의 동네인 기브아를 출발하여 베냐민 지파 북쪽인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와 사알림 땅을 두루 다녔고, 다시 베냐민 땅을 거쳤다. 즉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사울이 어떻게 사무엘 선지자가 거하는 라마까지 가게 되었는가를 소개하는 것이다.

5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 하는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6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그들은 이제 “숩” 땅에 이르렀다. 숩은 사무엘상1:1에 나온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라고 나오는 “라마다임소빔”이라는 말은  소빔(숩)사람의 양 언덕이라는 말이다. 즉 숩 사람들이 사는 두 언덕이라는 지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9장에서 사울과 그의 사환이 다다른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사무엘 선지자가 거하는 라마로 온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에 사울은 나귀들을 일단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그들을 걱정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걱정할 것을 걱정하기도 한다. 그때 사울이 데리고 간 사환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그 사환은 라마가 바로 사무엘 선지자의 본부인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인 사울에게 사무엘 선지자를 소개하고, 그에게 나귀에 대하여 물어볼 것을 제안한다.

그 사환이 사무엘에 대하여 소개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 그는 사무엘을 하나님의 사람(이쉬 엘로힘)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더 기도와 영성으로 우리를 다스려 나가야 할 것이다. (2)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존중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무겁다”라는 의미의 “카바드”에서 온 말이다. 이 말이 명사가 되면서 “케보드” 즉 “영광”이라는 말로 발전하게 된다. 사무엘상 2:30에서 나오는 하나님이 말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에서도 역시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자, 즉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도 존중히 여김을 받고,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도 존중히 여김을 받는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자, 즉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자,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도 경멸히 여김을 받고,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도 가볍게 대함을 받게 된다.” (3) “그가 말한 것은 다 응하나니”: 존중히 여김을 받는 것은 또한 그의 말이 얼마나 이루어지는 것인가 의해 결정된다. (4) “혹 그가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즉 하나님께 기도하듯이 선견자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환은 어느 정도 영적인 세계에 대한 안목이 있었고, 어느 정도의 영성도 갖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사환의 신분이었지만, 영적인 면에서는 사울보다 상당히 앞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이 사환처럼, 혹은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이 사환이 사무엘에게 대하여 표현한 네 가지 내용을 거꾸로 실행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즉 (1) 말씀과 기도와 은혜를 형제자매, 나아가 이웃들에게 나눈다. (2) 그 나눈 것이 실제의 삶이 되도록 산다. (3) 하나님을 존중히 여김으로 존중히 여김을 받는다. (4) 그때에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7        사울이 그 사환에게 이르되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드리겠느냐
                우리 그릇에 식물이 다 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도다
                무엇이 있느냐
8        사환이 사울에게 다시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내 손에 은 한 세겔의 사분 일이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
                우리 길을 가르치게 하겠나이다
사울과 그의 사환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기를 완전히 결정하기 전에 먼저 그에게 드릴 예물부터 걱정하였다. 사울은 어떤 음식을 드릴 것을 생각하였으나 이미 그들이 집을 출발할 때 가지고 왔던 모든 음식은 떨어지고 없었다. 그래서 사환에게 혹시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사환은 마침 은 1/4 세겔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의 주인인 기스가 그를 보내면서 준 돈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의 개인적인 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 돈을 가지고 사무엘에게 주면서 나귀들이 어디로 갔는지 가르쳐 달라고 할 셈이었다.

하나님은 사울과 그의 사환에게 사무엘을 만나게 하실 때, 나귀의 일로 만나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을 통하여 엄청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우리에게 세상적인 필요가 있어도 하나님과 기도의 끈, 말씀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과 성숙한 대화를 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성숙한 대화를 하지 못하여도, 비록 세상적인 대화를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그 대화를 통하여, 그 대화를 성숙한 대화로 이끄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9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옛적에”라는 말의 시점은 사무엘상을 기록하는 시점이다. 그때에는 선지자 (先知者“나비”) 라는 단어보다 선견자 (先見者, “로에”) 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선견자는 “미리 보는 사람”이고 “선지자”는 “미리 아는 사람”으로, 선견자는 사건이 어떻게 이루어질 지를 말해주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었다. 선지자는 곧 예언자이다.

예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지금의 사회나 사람의 상황을 보고 그것이 죄임을 알아서 그 죄를 지적하는 것을 예언(預言)이라고 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말하는 것 또한 예언(豫言)이라고 한다. 한문이 같으므로 많은 오해나 혼돈이 있다. 구약의 거의 모든 예언은 첫 번째 의미의 예언에서 시작되어 두 번째 의미의 예언으로 연결되어진다.

10        사울이 그 사환에게 이르되
                네 말이 옳다 가자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 있는 성으로 가니라
11        그들이 성을 향한 비탈길로 올라가다가
        물 길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그들에게 묻되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사울은 그 사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것을 볼 때, 사울은 괜한 고집을 피우지 않는 순수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무엘 선지자가 있는 라마로 간다. 그들이 라마 성의 비탈길을 올라가고 있을 때, 물을 길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게 된다. 인간의 우연은 하나님의 필연이다. 사울과 사환은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즉 “그 선견자, 즉 사무엘이 여기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12        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있나이다
                보소서 그가 당신보다 앞섰으니
                빨리 가소서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그가 오늘 성에 들어오셨나이다
소녀들은 사무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나님이 적당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신 것이다. 그녀들이 하는 말은 사무엘이 다른 도시에 출타했다가 오늘 마침 돌아와서 사울 일행보다 조금 먼저 앞에 서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무엘 선지자가 돌아오고 있는 이유는 라마에 있는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를 지내기로 되어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듯이 사무엘상 저자는 지금 시간에 대하여 매우 예민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필연적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왜 언약궤와 성막이 아닌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느냐는 점이다. 산당(바마)은 높은 언덕이나 산 위에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는 곳이었다. 엘리 제사장의 때까지는 실로가 예배의 중심지였지만, 언약궤를 빼앗긴 이후로 성막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3                당신들이 성으로 들어가면
                그가 먹으러 산당에 올라가기 전에 곧 만나리이다
                그가 오기 전에는
                백성이 먹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제물을 축사한 후에야
                청함을 받은 자가 먹음이라
                그러므로 지금 올라가소서
                금시로 만나리이다
        하는지라
아마 백성들은 사무엘 선지자가 오기 전에 이미 제사를 다 마치게 되어 있었나보다. 그리고 제물을 나누어 먹는 시간에 사무엘이 도착해서 그가 축사, 즉 감사 기도를 한 후에 예배자들이 함께 먹게 되어 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14        그들이 성읍으로 올라가서
        그리로 들어갈 때에
        사무엘이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마주 나오더라
이렇게 하여 사울과 사무엘의 역사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인간의 우연은 하나님의 필연이다.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필연을 우리는 우연이라고 부른다. 하나님 안에서 우연이란 없다.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 주실 것이다.

15        사울의 오기 전 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가라사대
16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특별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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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파노라마 제 17 강 (2/22/06) 제 4-13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1) 오늘부터 우리는 사무엘상에 대하여 공부한다.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원래 한 권이었던 것을 주전 250년경 헬라어로 번역할 때, 양을 감안해서 상...
    Date2006.02.26 By최정인 Repl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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