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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파노라마 제 18 강 (3/1/06)
>제 4-14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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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은 언약궤의 행로이다. 사무엘상 4, 5, 6장에 이르는 이 부분은 쉽게 간과되기 쉬우나 우리에게 중요하고도 많은 영적인 교훈을 전달해 주고 있다. 블레셋의 침공을 맞은 이스라엘은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며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나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대패하고, 법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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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 1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쳤더니
> 2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        그 둘이 싸우다가
>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        사천 명 가량이라
>사무엘상 4장은 지금까지 엘리 가문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의 전쟁의 형태로 임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인간이 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 가장 비참한 일이다. 또한 질병, 천재지변 등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엘리의 가문에 몰락하는 과정과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의 선지자로 이스라엘 가운데 등장하는 것은 서로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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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전쟁 상황으로 몰아넣으신다. 아마도 이번 전쟁은 어떤 이유였든지 간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사사 삼손 시대 이전부터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전쟁은 에벤에셀과 아벡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의 서전에서 패해서 약 4,000의 군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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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                우리 중에 있게 하여
>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        하니
>이 심각한 문제를 다루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태도에 관심을 가져보자. 그들은 블레셋과의 전쟁의 모든 책임이나 원인을 하나님께 두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점에서는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회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아닐까? 관계 회복이 없는 회개는 없다. 모든 관계 회복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문제를 자기들에게 두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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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이 패배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방법은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전쟁터로 옮겨와서 자기들 중에 그것이 있게 하여, 그것으로 자기들을 그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할 생각을 하였다. 그 자체는 이해될 수 있다. 다윗도 암몬과의 전쟁에서 자신은 왕궁에 있었어도 하나님의 언약궤는 전장에 나가 있도록 했다.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불러서 술을 먹인 후, 집으로 가서 아내와 자라고 했을 때, 우리야가 뭐라고 했었는가? “우리야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삼하 11:11).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나간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회복 없이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승리를 보장해 줄 것이라는 발상이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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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좀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믿음이 좋아 보이게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태도이지, 하나님께 순복하려고 하는 태도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없이 하나님을 사용하려고 하는 태도는 일종의 업유즈 (abuse)인 것이다. 일종의 악용, 일종의 오용인 것이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는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관계의 회복은 무시하고, 예배를 드렸기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결과가 나쁘게 나왔다고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적이 많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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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도록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오기만 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분명히 잘못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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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출애굽기 25장은 하나님의 언약궤에 대한 내용이 처음으로 언급된다. 출애굽기 25장을 보자. 언약궤를 어떻게 만드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언약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상징하는 일종의 종교적 상징물이다. 일체의 상징물을 제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기는 불가능하다. 마치 선물이 없이 사랑을 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음과 선물을 생각해 볼 때, 진정한 마음이 있으면 선물이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상징물도 역시 이런 면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상징물과 우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오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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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돕는 사람들이나, 체계, 물건 등이 있다고 할 때,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해 볼 수 있다. (1)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성심으로 섬겨야 한다. (2)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돕는 목회자들이나 지도자들을 사랑한다. 교회나 교회의 조직을 사랑한다.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성경이나 십자가 기타 신앙서적 등을 존중한다. (3) 그러나 위의 것들이 하나님을 대치할 수는 없다. 이는 마치 언약궤 그 자체가 하나님을 대치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하는 순간 그것은 곧 우상이 된다. (4) 그러나 위의 것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 마치 개혁인 양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위의 것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돕는 한에서 존중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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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는 그 안에 십계명을 받은 돌판을 보관하면서, 그 윗면의 양쪽에 천사 즉 그룹을 쳐서 만들어 놓고, 그 양 천사와 윗면 사이의 공간에 하나님이 임하시는 공간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언약궤는 두 개의 채로 어깨에 메고 이동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사무엘상 4장, 5장, 6장은 언약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므로 우리가 언약궤를 잘 공부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어찌되었건 간에 이스라엘은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아벡 전장으로 이동시켰고, 그 일로 자연스럽게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장에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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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        땅이 울린지라
>이제 이스라엘은 승리에 대한 기대감으로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큰 소리로 외쳤고, 이로 인하여 땅이 울릴 정도였다. 백성들의 사기가 진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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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        하다가
>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이것은 곧 블레셋 사람들로 하여금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중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하였다. 아마도 그들도 나름대로 정보를 얻는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정보는 너무나 중요하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知彼知己 百戰不敗: 원래 원문에는 백전불패인데 더 쉬운 말인 백전백승으로 바뀌어서 알려졌다.)라는 말이 손자병법에 나오는데,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정보인 것이다. 자신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함께 상대방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의미하는 것이다.
>
>그래서 블레셋도 나름대로의 방법을 통하여 이스라엘 진에 이스라엘의 종교의 최대의 상징물인 언약궤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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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        하고
>        또 가로되
>                우리에게 화로다
>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이 일은 블레셋을 긴장시키게 되었다. 그들은 언약궤의 출현을 곧 이스라엘의 신의 출현으로 이해하였다. 언약궤를 가지고 온 이스라엘의 목적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블레셋은 이것이 곧 자기들에게 군사적인 패배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전쟁터에 언약궤를 가지고 나온 것을 블레셋은 이전에는 경험을 하지 않았기에 더욱 긴장한 것이다.
>
> 8                우리에게 화로다
>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 인을 친 신들이니라
>블레셋은 근본적으로 우상을 섬기는 다신교를 믿고 있었다. 사실 유일신교는 오직 이스라엘에서만 나온 것이다. 그렇기에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에 복수로 “이 능한 신들”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여리고의 기생 라합의 지식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런 지식이었다. 즉 사이비이다. 라합은 정탐꾼들을 숨겨주면서 무엇이라고 고백했는가?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수 2:9-11). 라합의 정확한 지식, 혹은 정보는 곧 그녀와 그 가족 친지의 구원으로 연결되었다.
>
> 9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같이 말고
>                대장부같이 되어 싸우라
>        하고
>그런데 언약궤를 전장에 가지고 나온 이스라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블레셋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겁을 먹던 상황에서 오히려 대장부가 되는 상황으로 반전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히브리 사람들은 사사 삼손의 시대부터 시작되어서 블레셋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아내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니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삿 13:5). 즉 구원이 아니라 구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국 삼손은 혼자의 몸으로 블레셋과 싸우다 죽고 말았다. 그러나 블레셋은 계속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
>10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        이스라엘이 패하여
>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        살육이 심히 커서
>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 만이었으며
>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참담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엘리에게 경고한 대로(삼상 2:34),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었다. 이스라엘의 보병 즉 백성이 30,000명이나 죽었다. 그리고 법궤를 빼앗겼다. 이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궤를 빼앗기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잘못된 의뢰에서 벗어나도록 하시고, 진정한 회개로 이끄시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성전을 지은 후에도 역시 성전으로 인하여 구원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성전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시라고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대하 7:14). 성전 때문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모든 회복은 회개로부터 나온다. 진정한 부흥은 회개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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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원한다.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서 산에 올라갔을 때, 산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무엇을 했는가? 눈에 보이는 지도자 모세가 눈에 보이지 않자, 아론을 재촉해서 금송아지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으로 대치하려고 하였다. 마치 이스라엘이 언약궤로 하나님의 대치하려고 한 것과 마찬가지 시도라고 할 수 있다.
>
>12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에서 달려 나와
>        그 옷을 찢고 그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        실로에 이르니라
>성경 시대는 오늘날같이 통신이 발달한 때가 아니었으므로, 전쟁의 소식은 언제나 발이 빠른 사람의 몫이었다. 그옛날 마라톤 평원에서 달려온 페이디피데스는 페르시아의 침공을 물리친 승리의 소식을 전한 용사였지만,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하고, 그 소식을 전하는 한 베냐민 사람을 보게 된다. 그는 그의 소식의 내용의 비참함을 전하기 위해서 그의 옷을 찢고, 그 머리에 티끌을 무릅썼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이 아니라 실로, 하나님의 전이 있고, 하나님의 궤가 있었으며, 하나님의 제사장 엘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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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
>이때 엘리는 하나님의 전이 있는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전쟁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쟁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사무엘상 저자는 그때 그의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하나님의 궤를 가져가고자 할 때 엘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아마 그 궤를 가지고 전쟁터로 나가는 것이 바르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아니면 그에 대한 어떠한 감각도 없었을까? 엘리는 비록 그것을 가지고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할 수 있는 어떠한 영적인 리더십도 잃었을 것이다. 그는 그저 심판의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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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람이 성에 들어오며 고하매
>        온 성이 부르짖는지라
>14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                이 훤화하는 소리는 어찜이뇨
>        그 사람이 빨리 와서 엘리에게 고하니
>15        때에 엘리의 나이 구십팔이라
>        그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그 베냐민 사람은 실로 성에 들어오는 것과 전쟁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을 동시에 하였다. 그러자 온 성이 부르짖었다. 엘리는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서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엘리는 “이 훤화하는 소리는 어찜이뇨?”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이 엘리에게 빨리 와서 고하였다. 사무엘상 저자는 그 때 엘리의 나이가 98세였다고 전한다. 나이도 나이이지만 그는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즉 어느 정도 희미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완전히 실명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엘리 가문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삼상 3:11)고 말씀하셨다. 엘리는 실명을 하여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귀는 살아있었고, 그의 두 귀가 울리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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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의 눈이 실명한 것은 어떤 면에서 나이에 의한 결과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의 영적인 실상을 말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엘리의 모습을 볼 때에 많은 생각이 있지만, 나이가 많거나 건강이 허락지 않을 때에는 분명히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엘리는 이런 점에서 시기를 놓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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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 사람이 엘리에게 고하되
>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        엘리가 가로되
>                내 아들아 일이 어찌 되었느냐
>그는 자신의 신분을 정확하게 보고하였다. 자기가 베냐민 지파라는 것, 자기의 이름 등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가 전쟁의 마당에서 도망하여 나왔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고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엘리는 “내 아들아 일이 어찌 되었느냐?”고 묻는다. 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이 다였다. 그의 마음속은 하나님의 궤에 대한 염려로 가득하였지만, 그에 대한 것은 직접 표현하지 못하고, 일이 어찌되었느냐며 포괄적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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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엘리의 질문에 대하여 소식을 전하는 블레셋 사람은 비교적 정확하게 결과를 요약해서 말하였다. 첫째로 전쟁에서 패하였다. 둘째로, 그 결과 무수한 사람이 죽었다. 10절에서는 이스라엘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3만이라고 하였다. 엄청난 숫자가 죽은 것이다. 셋째로 당신의 두 아들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했다. 넷째로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다라고 하였다. 급한 가운데에서도 이 보고자는 매우 간단하면서도 정확한 보고를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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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 년이었더라
>엘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궤로 인하여 떨리고 있었는데, 급기야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겼다는 말을 듣자,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급사하였다. 사무엘상 저자는 그가 죽게 된 경위를 그가 나이가 많은데다가 비둔하였다고 하였다. 엘리는 본인의 자녀들만 살찌운 것이 아니라 본인도 살찌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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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 시간에 엘리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여러분들은 엘리의 생애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특별히 지도자, 말씀의 지도자들은 엘리를 통하여서 배울 것이 너무나 많다. 즉 엘리같이 되지 말자는 것이다. 엘리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식을 잘 길러야하며, 본인에 대한 관리도 또한 철저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4:7-8)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적인 건강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늘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 육체적인 건강도 중요하다. 체중 관리를 잘 해야 한다. 미국에는 너무나 과체중의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이 무뎌질 수 있다. 체중 관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운동이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온 몸의 스테미너가 점점 더 떨어지게 되어 온갖 병이 생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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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산기가 가까웠더니
>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엘리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마침 해산의 시기가 가까웠던 것이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그녀는 여기서 그 모든 소식을 듣는다. 전쟁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궤에 대하여 맨 마지막에 말하였지만, 사무엘상 저자는 하나님의 궤가 빼앗긴 것을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하나님의 궤가 빼앗긴 것과 시아버님 엘리의 죽음과 남편 비느하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게 되었다. 비참한 소식을 듣고 산기를 느낀 것이니, 그 정신적인 충격이 출산의 시간을 앞당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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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죽어갈 때에 곁에 섰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        하되 그가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 아니하고
>21        이르기를
>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
>그 여인은 아이를 낳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 아이는 아들이었다. 그녀의 출산을 돕던 여인들은 그녀에게 아들을 낳았다며 그녀를 위로하고 격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 대하여 대답도 안 하고, 그 사실에 대하여 관념하거나 기뻐하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러면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말하면서 그녀의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다. 이가봇은 “이”와 “카보드”의 결합이다. 카보드는 전에 공부하였듯이 “무겁다”라는 형용사에서 온 명사로 “무거움” “영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부정의 의미를 나타내는 “이”가 붙어서 “영광이 없음”의 의미로 “이카보드”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녀가 이 이름으로 그녀의 아들의 이름을 붙일 때, 그녀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
>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 사무엘상 저자는 22절에서 다시 한 번 그녀가 한 말을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기 때문에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하였고, 그리하여 “이카보드”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부연 설명을 한다.
>
>제 5 장
> 1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은 전쟁에서 이긴 후 이스라엘이 전쟁터에 가지고 나온 하나님의 궤를 소중하고도 자랑스러운 전리품으로 획득하게 되었다. 그들은 에벤에셀 전투에서 이긴 후에 해안 바닷길을 따라 내려와서 첫 번째 도시 국가인 아스돗에 이르렀다. 아스돗에는 다곤의 신당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궤를 그곳으로 가지고 간 것이다. 블레셋은 주전 12세기 경에 그리스 남단의 크레타 (갑돌) 섬에서 팔레스틴으로 이주한 유럽인종으로 해양민족이다. 이스라엘은 사사시대의 말기인 사사 삼손의 시절부터 블레셋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였는데,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가서야 블레셋을 완전하게 억누를 수 있었다.
>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가지고 전장으로 나갈 때에도, 블레셋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을 때에도 무기력하게, 아무런 행동도 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능해서인가?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아서일까?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실 때를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왜 하나님은 종종 무기력하시게 보이실까? 하나님의 침묵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스라엘은 그것을 깊이 생각해 보았어야 한다. 언약궤가 빼앗긴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서로 연결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도 얼마나 무기력하게 죽으셨는가? 마치 하나님이 실패하신 것 같고, 하나님이 무능하신 것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 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본문은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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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짐과 섬김과 십자가와 부활의 도는 얼핏 보기에는 무기력하고, 실패하고, 무능한 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길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좌우의 자리를 요구했다. 다른 제자들도 그 이야기를 듣고 분히 여겼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2-45)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으로 볼 때, 제자들의 삶의 철학과 예수님의 삶의 철학은 정반대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신앙이 성숙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의 이 낮아지심, 섬기심,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삶의 철학으로 살지 아니하면, 우리는 여전히 섬김을 받으려하고, 지배하려고 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는 삶의 철학으로 살게 되어 있다. 그러면 결국은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이고, 성화의 길과는 멀기만 한 것이다. 낮아지지 않으면 섬길 수 없고, 섬김의 극치는 십자가이며,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 없이는 올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으로 빼앗겨 가는 수모를 당한 것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것과는 놀라운 상관관계가 있고, 이를 통하여 우리의 삶에서도 섬김과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
> 2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의 당으로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들어갔다. 우리가 사사기를 공부할 때, 다곤이라는 블레셋 신이 나온 것을 기억한다. 블레셋의 다섯 방백은 드릴라를 매수하여 삼손의 머리털을 밀고, 삼손을 생포한다. 그들은 삼손의 두 눈을 빼고 옥에 가두어 맷돌을 돌리게 하였다. 그때 블레셋 방백들이 무슨 말을 하였는가?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붙였다.” 그렇게 말한 후 다 모여 그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였다. 백성들도 삼손이 두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것을 보고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우리 토지를 헐고 우리 많은 사람을 죽인 우리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붙였다”하고 자기 신 다곤을 찬송하였다.
>
>그러면 다곤 신은 어떠한 신인가? 다곤 (Dagon) 은 반인반어(半人半漁)로 머리와 팔과 몸은 사람이고, 다리 부분은 물고기인 신이다. 그러면 바로 인어를 상상할 수 있는데, 남자 인어를 생각하면 곧 다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주전 12세기에 가나안 연안에 정착하자 곧 다곤 숭배를 채용하고, 가사 (삿 16:23), 아스돗 (삼상 5:27), 벧스안 (삼상 31:10) 등에 신전을 갖게 되었다. 다곤은 원래 고대 셈족의 농업신으로서 주전 25세기 이래 널리 숭배되어 왔다. 다곤을 숭배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생산을 증대하는 것이었다. 자녀들을 다산하고, 밭의 소출이 증대되고, 어장에서 고기들이 많이 잡히게 되고, 바다에 나가서 풍랑을 이기고, 나아가서 적들과의 전쟁에서 이기도록 복을 내리는 신으로 숭배하였던 것이다.
>
>그러면 블레셋 사람들은 왜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곤 신상 곁에 같다가 두었을까?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일종의 임재로 보고, 하나님이 다곤에게 포로로 잡혀 온 것을 상징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다곤에게 숭배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였던 것이다. 블레셋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하고, 다곤을 높임으로써 자신들과 그들의 신의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
> 3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런데 역사는 밤에 쓰인다고 하였듯이 밤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떤 일이 정확하게 밤에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아스돗의 블레셋 사람들은 아침에 그들의 눈을 의심할만한 일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보는 누구에게나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 굴복하여 여호와께 경배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
>정말 여리고의 기생 라합 정도라면 이 사건을 통해서라도 참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블레셋의 어떠한 누구도 그렇게 하였다는 증거가 없다. 그들은 기분이 이상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우연한 상황으로 치부하면서 그들의 신상을 일으켜 본래 있었던 자리에 세웠다.
>
>우상은 원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나무로 만들어서 세워 놓은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은 블레셋 사람들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블레셋 사람들은 이 일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보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기분 나쁜 일이 왜 생겼을까 하고 그냥 다곤을 제 자리에 세워 놓기만 했다. 일차로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그것이 경고인지도 모르고 지나가게 된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그것이 경고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늘 다가오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음성에 예민해야 한다.
>
> 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낮 동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는데, 밤사이에 다시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 일은 지난 번 일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은 것은 지난번과 같았지만, 이번에는 다곤의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진 것은 곧 전쟁터에서 사람들이 죽은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비록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3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죽도록 하셨지만, 그것은 블레셋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블레셋은 그 전쟁을 자기들이 이스라엘을 이기고, 자기들의 신이 이스라엘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이긴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간단하게 다곤의 머리와 두 손목을 끊으심으로 이번 전쟁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지신 것이 아니라 다곤을 심판하기기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경고하신 것이다.
>
>여기에서 블레셋은 분명하게 알았어야 한다. 다곤이 하나의 조립품도 아닌데, 왜 다곤의 머리와 두 손목이 잘라졌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들은 그냥 황당했을 뿐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이번에도 사람이 아닌 우상을 치심으로써 블레셋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배양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욘 4:10-11). 극악무도한 니느웨 사람들과 그곳에 있는 아이들과 육축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이 왜 블레셋 사람인들 사랑하시지 아니하셨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블레셋 사람들을 집적 치신 것이 아니라, 블레셋의 신 다곤을 치신 것에는 어떤 경고적인 면도 있지만, 분명히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
> 5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당에 들어가는 자는
>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그러나 블레셋은 그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의 관습만이 더 생겼을 뿐이다. 다름이 아니라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당에 들어가는 자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않는 관습이 생겨난 것이다. 바로 그 문지방에 다곤의 잘린 머리와 잘린 두 손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
> 6@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니
>아스돗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의 때와 경고의 때를 놓쳤을 때, 드디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다.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손은 그러므로 여호와의 심판의 손이신 것이다. 우리는 자비의 때가 곧 경고의 때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자비의 하나님이 동시에 심판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에 임하자, 독종이 그들에게 임했고, 그 독종이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임한 독종은 무엇일까? 아마도 학자들은 흑사병(黑死病) 곧 페스트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음 장에 4절에 보면 블레셋이 하나님께 드릴 속건제로 “블레셋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보낸 것을 볼 때, 들쥐로 인한 페스트를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과연 들쥐에 의한 페스트라고 해도, 그러한 과학적인 사실을 주전 10세기 경의 블레셋 사람들이 알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도하지만, 어찌하였든 이 독종은 무서운 전염병으로 아스돗 사람들을 친 것이다. 주후 14세기 경의 유럽은 흑사병 (페스트 혹은 출혈열, 즉 에볼라)으로 전 인구의 1/3정도를 잃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었다.
>
> 7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로되
>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
>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        하고
>이제 블레셋 사람들은 깨달았다. 이스라엘의 신의 궤가 그들에게 있으면, 이스라엘의 신이 그들과 그들의 신 다곤을 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자기들의 신이 더 강하다는 환상이 산산이 깨어지는 순간인 것이다.
>
> 8        이에 보내어 블레셋 사람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
>        그들이 대답하되
>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가라
>        하므로
>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 갔더니
>블레셋의 다섯 도시는 아스돗, 가드, 에그론, 아스글론, 그리고 가사이다. 아스돗의 방백은 나머지 네 도시들의 방백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방백들의 대책회의를 하였다. 그들의 회의 제목은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하는 것이었다. 정답은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라”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오답을 결정하였다. 즉 “이스라엘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가라”는 것이었다. 가드는 그 유명한 골리앗의 출신지이다. 즉 가드에는 거인들이 많이 살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가드는 다른 도시들에 비하여 더 강하게 느껴졌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가드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드의 방백과 사람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하나님의 궤를 받게 된 것이었다.
>
>결정적인 해결책이 아닌 미봉책은 더 큰 문제를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결정적인 해결책인 회개를 하지 않고 미봉책으로 언약궤를 전장으로 옮겨 갔다가 큰 실패를 하였듯이, 이제 블레셋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지 않고 커다란 고통을 입게 된다.
>
> 9        그것을 옮겨간 후에
>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에 더하사
>        성읍 사람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        독종이 나게 하신지라
>역시 독종이 가드를 덮쳤다. 여기서 작은 자와 큰 자는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이라는 의미인지, 신분이 낮은 자부터 높은 자까지라는 의미인지, 작은 사람부터 큰 사람까지라는 의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일 마지막 의미라면, 골리앗과 같이 큰 자들도 독종에는 어찌할 수가 없음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10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가로되
>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        하고
>가드 사람들은 얼른 하나님의 궤를 가장 가까운 에그론에 보내었다. 마치 불덩이를 받은 사람이 그 불에 데면서 그 불덩이를 다른 옆에 있는 사람에게 던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것은 에그론 사람들의 동의를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르자 에그론 사람들이 부르짖게 된 것이다. 그들이 즉, ‘가드 사람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 즉 에그론 사람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고 한다’라고 소리쳤다. 당연한 것이다. 이미 에그론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가 가는 곳에는 독종의 무서운 재앙이 임한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이것은 비단 에그론뿐만 아니라 모든 블레셋 전체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
>11        이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        하니
>그래서 다시 블레셋 다섯 방백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이번에는 바른 결정을 하였다. “이스라엘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참으로 바른 결정이다. 어디 비단 하나님의 궤뿐이랴? 우리 것이 아닌 것을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있다면, 그 원주인에게로 돌려보내야만 한다.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취해만 하는 바른 태도인 것이다. 강자가 약자의 것을 마음대로 빼앗고, 강국이 약국의 것을 마음대로 빼앗는 시대가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일이 계속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직하게 일해야 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
>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12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종으로 치심을 받아
>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여기서 하나님의 손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독종으로 죽었다는 말인지, 독종 이외에 다른 심판이 있었다는 말인지는 불분명하다. 독종으로 죽은 사람이 있고, 독종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다는 말로 이해되어진다. 그리하여 산 사람들은 부르짖었고,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 (The outcry of the city went up to heaven).
>
>제 6 장
> 1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        When the ark of the LORD had been in Philistine territory seven months,
>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의 아스돗, 가사, 에그론을 다니는 동안에 벌써 7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여호와의 보내신 독종으로 생명을 잃었고, 또 수많은 사람이 고통 가운데 살고 있었다. 처음에 하나님이 다곤을 넘어지게 하고, 또 다곤의 목을 치시고, 양 손목을 자르셨을 때, 다섯 명의 방백이 모인 대책회의에서 그들이 내린 결정이 결정적으로 잘못되었던 것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렇게 시간을 놓치면, 귀중한 생명이나 재화를 잃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
> 2        블레셋 사람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                그것을 어떻게 본처로 보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블레셋 사람들 즉 블레셋 방백들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이제 그들 종교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렀다. 여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블레셋 방백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방백들을 포함한 블레셋 사람들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도 역시 블레셋의 어떤 의미로든 지도자들이었다. 제사장들은 다곤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의미하고, 복술자들은 점을 치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정치, 사회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뜻대로 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종교 지도자들을 부른 것이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먼저는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라고 말하였다. 전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신”이라는 객관적인 이름으로 불렀지만, 이제는 “여호와”라는 좀더 주관적인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그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고, 여호와를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서 떠나가게 하실 것인가에만 생각을 집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궤를 본처 즉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것은 결정하였다. 그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부른 이유는 그 궤를 돌려보내는 것은 기정사실인데, 그것을 어떻게 돌려보내야 더 이상의 재앙이 없게 하느냐는 것을 알기 위한 것이었다. 그냥 아무렇게나 돌려보내도 될 성질이었다면, 자기들이 대충 돌려보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가는 더 심한 재앙이 그들에게 있을 것 같았기에 종교 지도자들을 부른 것이었다. 늦었지만 확실하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
> 3        그들이 가로되
>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                거저 보내지 말고
>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                그리하면 병도 낫고
>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성경에는 죄에 대하여 두 가지의 제사가 나온다. 하나는 속죄제이고 다른 하나는 속건제이다. 레위기에서 이 두 제사는 절차상 서로 비슷하다. 그리고 그 의미상의 차이점을 정확히 가려내기가 어렵다. 속죄제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를 다루는 반면에, 속건제는 배상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만큼, 사람의 상해가 포함된 경우들을 다루고 있을 것이다. 둘 다 죄를 객관적으로 다룰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 제물의 피를 사용할 것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또 둘 다 부지중에 지은 죄 혹은 피할 수 없는 율법의 죄들을 다룬다. 그러므로 이 문맥에서는 “죄”가 자주 순수한 의식적인 의미를 갖는다. 해산한 후에 속죄제를 드리는 경우가 이를 잘 입증해 준다. 이 경우 그 제사가 제물을 드리는 자를 거룩한 공동체의 완전한 일원으로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
>그런데 이방 신 다곤을 섬기는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이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낼 때, 그냥 궤만 돌려보낼 것이 아니라, 속건제의 제물과 함께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선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이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에 대하여 얼마나 알았을까? 그들이 여호와와 여호와 신앙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계시된 말씀 즉,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그들보다 열등한 피지배국 혹은 적국이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블레셋을 공격하는 아주 무서운 신이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들도 이 여호와 신앙으로 들어갈 것인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그들이 여호와의 손길에서 벗어날 것인가를 연구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더 이상의 하나님의 진노가 없게 할 것인가에 모든 관심의 초점이 모아져 있었던 것이다.
>
>그래서 그 종교 지도자들이 제안한 것이 바로 속건제를 보내라는 것이다. 즉 속건제를 보내는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시인한다는 의미가 있다. 비록 이스라엘이 법궤를 전쟁에 가지고 나왔고,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겼고, 그들로부터 법궤를 빼앗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절대로 자기들의 취해서는 안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다곤이 쓰러지고, 다곤의 머리와 손이 잘렸을 때에 하나님이 경고를 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자기들이 여호와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
>블레셋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렇게 속건제물을 드리면, 블레셋에 창궐하는 독종도 떠나가고, 그들을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손길도 떠나가실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만큼 그들의 관심은 오직 어떻게 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서 떠나가는가 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가다라 지방에 예수께서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을 때, 그 지역의 주민들은 군대 귀신이 되지 떼에게 들어가 그 돼지들이 몰살한 것을 보고, 예수님이 그 지역에서 떠나주기를 간구하였다. 하나님을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만난다는 것은 이만큼 고통스러운 것이다. 애굽의 바로나 지금 이곳의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권능을 보고도 하나님께 나올 수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면 우선 사랑의 하나님을 소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
> 4        그들이 가로되
>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        가로되
>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정치 지도자들은 속건제를 드릴 제물이 무엇이 옳을 것이냐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물어 보았다. 그들이 준 답은 금으로 만든 다섯 개의 독종과 다섯 개의 쥐를 속건제의 제물로 삼으라고 말해주었다.
>        (1) 여기서 다섯은 곧 다섯 방백과 다섯 도시를 의미한다. 이것은 먼저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이 여호와께 죄를 지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다섯 방백이 다스리는 다섯 도시 전체가 여호와께 죄를 지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의미한다.
>        (2) 다섯 개의 금독종과 다섯 마리의 금쥐는 그들을 괴롭힌 것이 곧 독종과 쥐임을 의미한다. 독종을 일으키는 병의 균은 보이지 않고, 오직 그들에게는 몸에 난 독종만 보인다. 그래서 그것의 형상을 본떠서 금으로 제물을 만들자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예전과는 분명하게 다르게 그들 주위에 쥐 (rat)들이 창궐하였다. 쥐는 영어에서 rat와 mouse로 분명하게 나뉜다. 우리말로 하면 집쥐, 혹은 시궁창에 있는 쥐와 생쥐로 구분될 수 있다. 여기서는 영어 번역에서 쥐 (rat)로 번역된 것으로 보아서 귀여운 생쥐가 아니라 징그러운 집쥐를 의미하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쥐를 금으로 만들어서 보내자고 한 것은 분명히 지난 7개월 동안에 그들이 많이 불어난 쥐로 인하여 그들의 산업과 삶에 심각한 고통을 당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독종과 쥐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이러한 고통과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한다.
>        (3) 그들이 독종과 쥐의 형상을 금으로 만든다는 것은 자기들의 가장 소중한 재물로 속건제를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속죄의 대전제를 그들은 몰랐다. 혹은 알았다고 할지라도 무시하였다. 이것이 바로 계시에 의한 신앙이 아니라 자기들의 생각에 의한 신앙의 맹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의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만족하려고 한다.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의 대답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        (4)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다. 너희는 블레셋 사람들을 의미한다면, 지금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상담하는 사람들은 블레셋 방백들을 제외한 지도자들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불확실하다. 중요한 것은 방백들의 죄나 백성들의 죄나, 방백들의 속죄나 백성들의 속죄가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 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5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주로 독종과 쥐로 블레셋을 공격하셨으며, 블레셋은 사람들과 신들과 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난다. 즉 독종으로 사람을 공격했고, 쥐로 농토를 유린한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신들은 특히 다곤을 여호와께서 목과 두 손목을 자른 것으로 공격하셨다. 이제 하나님이 그들을 공격하신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금독종과 금쥐를 만들어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곧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는” 것임을 알았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고, 하나님께 영화를 돌리면, 즉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그 심판의 손을 블레셋 사람들과 그들이 신들과 그들의 땅에서 경하게 하실 것이라는 생각에 의해서 이러한 제물로 속건제를 드리라고 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
> 6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같이
>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출애굽의 사건이 주전 1400년 중반에 일어났고, 사무엘상 초기가 1000년대 중반이라면 지금 블레셋의 종교 지도자들이 인용하고 있는 사건은 거의 400년 이전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 성격상 비슷하기 때문에 그들은 인용하고 있다. 애굽 사람들과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 200여만 명을 억류하여 그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었고, 생명을 유린하고 있었다. 이제 블레셋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의 상징이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억류하고 있었다. 애굽 인들과 바로는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기를 죽기보다 싫어하였다. 결국 애굽의 모든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부터,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 짐승에게 악질이 나는 재앙, 사람과 생축에게 악질이 나는 재앙,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 재앙이 날 때까지 바로는 버텼지만 마지막으로 짐승과 사람의 모든 장자가 죽는 재앙이 난 후에야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내었던 것이다. 이제 블레셋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재앙에서 떠나려면 하루 빨리 모든 예를 갖추어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
> 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                수레를 소에 메우고
>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 8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                궤 곁에 두고
>                그것을 보내어 가게하고
>이제 종교 지도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그 본처 즉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준다.
>        (1) 새 수레: 사용하였던 것이 아니고, 새로운 것을 만들라고 강조한다. 즉 죄에 오염되지 않은 정결한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        (2) 멍에를 매어보지 못한 소: 역시 새로운 소들을 의미한다.
>        (3) 젖 나는 소들: 현재 송아지들을 기르고 있는 소들, 즉 자식이 있는 짐승들, 자기의 집과 자기의 새끼에 대하여 강하게 돌아오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짐승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궤를 실어 보냈을 경우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자기들의 새끼에 대한 생각보다 하나님의 궤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전으로 돌려보내고자 하는 강한 열망으로 가득 차도록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도록 젖을 먹이는 암소를 선택하라고 한 것이다.
>        (4) 송아지를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라: 송아지들이 함께 따라가면 여러 가지가 방해가 되므로 돌려보내라고 하였으며, 그래야 어미 소들이 자기 새끼들에게 가려고 하는지, 이스라엘로 가려고 하는 지를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5) 여호와의 궤를 수레에 싣고, 속건제의 제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라: 자기들의 죄와 회개의 의사를 분명하게 한다.
>        (6) 사람이 그 수레를 끄는 것이 아니라, 짐승인 두 마리의 암소가 그 수레를 끌고 가도록 한다.
>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블레셋의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이 고안한 방식대로 궤를 돌려보내기를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은 레위인들이 그 궤를 메는 것이었다. 그들은 레위인을 불러서 레위인들로 하여금 궤를 어깨에 매서 이동하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그런 구체적인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
> 9                보아서
>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                그 손이 아니요
>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블레셋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그 두 암소를 사용하실 것을 믿었다. 자기 나라에는 어느 누구도 그 궤를 이동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오직 두 마리의 암소가 그 궤를 끌고 이스라엘 땅의 첫 성인 벧세메스로 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면서 만일 기대한 대로 되면 그것은 그 재앙이 여호와로부터 온 것이요, 그 암소들이 그리로 가지 않거나 돌아오면 지난 7개월간의 재앙은 그저 우연한 것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음을 제안했다.
>
>벧세메스 (Beth-Shemesh)는 집을 의미하는 베이트와 태양신을 의미하는 샤마슈가 합성된 단어로 유다 세벨라에 있던 성읍의 이름이다. 원래 아모리 사람들은 하르 세메스 (태양의 산)로 불렀었다 (삿 1:35). 단지파가 차지할 때에는 이르 세메스 (태양의 성읍)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다시 단 지파가 블레셋 사람의 압력으로 북방으로 떠난 후에는 유대 지파의 영지가 되어서 (수 15:10), 유다 지역에 사는 레위지파, 즉 제사장의 성읍이 되었다 (수 21:16). 이렇게 보면 왜 블레셋의 종교 지도자들이 다른 곳이 아닌 벧세메스를 여호와의 궤를 반송하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그곳으로 가야만 가장 그 궤를 잘 받아서 여호와의 궤가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안전하고 합당하고 적절하게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
>10@        그 사람들이 그 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        수레를 메우고
>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        여호와의 궤와
>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        수레 위에 실으니
>블레셋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하라는 대로 했다. 다른 대안이 없었다. 이것은 공동체 전체의 죽고 사는 문제이었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
>암소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경우에는 말을 하지 못하며, 이성이 없는 짐승들도 원하시기만 하시면 사용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발람 선지자를 꾸짖으실 때에 나귀의 입을 여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두 마리의 암소도 역시 하나님의 궤를 실은 수레를 끄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가는 대로를 행하여 곧장 갔다. 그러나 그들은 떼어져서 집으로 돌려보내진 자기 새끼들 즉, 송아지들을 생각하여 구슬피 울었다. 왜냐하면 이 여행길이 자기들이 생명이 다해지는 길임을 이 암소들은 알았기 때문이다.
>
>암소들은 하나님의 십계명을 실은 언약궤를 싣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님을 모시고 어떻게 가고 있는가? 좌로나 우로나 얼마나 치우치는가? 주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 하니라” (눅 9:62)고 하셨다. 암소들은 송아지 생각에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에 우는가? 무엇이 아쉬워서 우는가? 무엇이 아쉬워서 쟁기를 잡고 뒤를 바라다 보는가?
>
>이제 블레셋의 방백들이 다시 나온다. 블레셋의 방백들은 블레셋 백성들을 대표하여서 그 암소들이 정확하게 벧세메스로 가는지 알기 위해서 그 수레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가지 않기를 주의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또한 새로운 재앙의 길이 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
>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        눈을 들어 궤를 보고
>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벧세메스는 유다 지파에 속한 레위인들인 제사장들이 거하는 성읍이었다. 레위지파는 그핫 자손, 게르손 자손, 므라리 자손으로 나뉜다. 그핫 자손은 아론 자손 즉 제사장 가문을 포함한다. 각 지파는 각각 다음의 지역에서 살았다.
>        (1) 그(고)핫 자손 중 아론의 자손들: 유다 지파, 시므온 지파, 베냐민 지파, 13성읍
>        (2) 그 남은 그핫 자손들: 에브라임 지파, 단 지파, 므낫세 반 지파, 10성읍
>        (3) 게르손 자손들: 잇사갈 지파, 아셀 지파, 납달리 지파, 므낫세 반 지파, 13성읍
>        (4) 므라리 자손들: 르우벤 지파, 갓 지파, 스불론 지파, 12 성읍
>이 중에 아론의 자손들 제사장이 살고 있던 13성읍은 다름과 같다:
>        (1)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 기럇아르바 (즉, 헤브론), 립나, 얏딜, 에스드모아, 홀론, 드빌, 아인, 윳다, 벧세메스 -- 9성읍
>        (2) 베냐민 지파: 기브온, 게바, 아나돗, 알몬 -- 4성읍
>
>그러므로 벧세메스는 레위 지파의 그핫 자손 중 아론의 자손들인 제사장들이 살고 있던 열 세 성읍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블레셋의 방백들은 자기들의 도시로부터 가까우면서도 제사장들이 살고 있던 성읍인 벧세메스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암소들이 가도록 하고 그 뒤를 따라 갔던 것이다. 마침 벧세메스 사람들은 골짜기에 있는 자기들의 밀밭에서 밀을 추수하고 있었다. 그들은 눈을 들어 암소 두 마리가 아무런 사람들의 인도를 받지 않고도 무엇인가를 싣고, 블레셋 쪽에서 오는 것을 보았다. 벧세메스 주민들은 상당수가 제사장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최근에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다 잘 알고 있었다. 약 7-8개월 전에 일어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약 3만의 군사가 죽임을 당하고,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고, 무엇보다도 더 경악할만한 사건은 하나님의 법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나갔다가 블레셋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이다. 이 일로 제사장 엘리는 비참하게 죽고, 법궤와 제사장이 없는 실로의 성막은 거의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유다와 시므온과 베냐민 지파에 흩어져 사는 아론 지파 제사장들뿐만 아니라, 모든 레위인, 모든 이스라엘이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무척 괴로워하고 있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여호와께서 블레셋에서 블레셋 사람들을 독종으로 치시고 계시다는 내용을 들었다. 이제 하나님께서 법궤를 이스라엘로 곧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
>마침내 날이 이르러서 블레셋에서 법궤는 암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실려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그 암소를 이끄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그들이 젖먹이는 송아지를 강제로 집에 남겨 두고 왔기에 울면서 수레를 끌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벧세메스로 오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수레를 정확하게 오도록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
>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        선지라
>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사무엘상 기자는 어떤 사건을 기록함에 있어서 매우 정확함을 보여준다. 이 기사에서도 블레셋에서 보낸 암소들이 끈 수레가 멈춘 장소가 정확하게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멈추어 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여호수아가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
>이제 무리가 모여들었다. 그들은 먼저 그 암소들이 끌어온 수레를 도끼 등을 이용하여 장작으로 만들었다. 새로 만들어진 수레를 아낌없이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밭 곁에 있는 큰 돌 근처에서 여호와께 번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법궤를 끌어온 두 마리의 암소를 잡아서 여호와께 번제로 드렸다. 제사장의 동리인 만큼 어떻게 단을 쌓는지, 어떻게 번제를 드리는지 너무나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우리가 레위기를 읽은 대로 번제로 드리는 희생제물은 소나 양을 드릴 때는 반드시 수컷으로 드리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레 1:3).
>
>우리가 여기서 다시 한 번 이 암소들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법궤와 속건제물을 이끌고 벧세메스로 잘 왔는데, 비록 울었지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잘 왔는데, 또 온 몸을 바쳐서 주님께 드려져야 했던 것이다. 이 암소들의 이야기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두 번째 편지의 한 부분이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5-8). 바울은 그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었던 것이다. 관제란 피를 제단에 붇는 제사 의식을 말한다. 바울은 자기의 남은 모든 피를 주님의 제단에 부어 드려서 주님께 드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그가 곧 순교할 것을 예상하고 디모데에게 한 말이다.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암소들이 울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자기들이 가는 이 길이 마지막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들의 송아지들을 생각하며 운 것이 아닐까? 암소들도 자기들의 죽을 때를 알고, 그 죽음이 바로 거룩한 희생으로 드려지는 것임을 알았을 때, 사도 바울은 그것을 왜 몰랐을까? 더욱이 우리 주님은 예루살렘을 말씀하실 때마다, 체포당하시고, 장로들에게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늘 말씀하셨다.
>
>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        큰 돌 위에 두매
>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
>여기서 말하는 레위인들이란 곧 아론 자손 제사장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여호와의 궤와 금 보물 상자를 내려서 그 큰 돌 위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들을 드렸다. 실로에 있던 여호와의 전의 기능이 이제 벧세메스의 여호수아의 밭의 곁에 있던 돌로 임시적으로 옮겨 온 것이다. 그러나 법궤만 있었지 다른 것이 없었으므로 그냥 그대로 두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상태이었다. 그러나 일단은 궤가 돌아온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이다.
>
>16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아마 블레셋 방백들은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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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파노라마 17 (2/22/06) 제 4-13 과 "사무엘상 (1)"

    성경의 파노라마 제 17 강 (2/22/06) 제 4-13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1) 오늘부터 우리는 사무엘상에 대하여 공부한다.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원래 한 권이었던 것을 주전 250년경 헬라어로 번역할 때, 양을 감안해서 상...
    Date2006.02.26 By최정인 Repl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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