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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파노라마 제 17 강 (2/22/06)
제 4-13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1)

오늘부터 우리는 사무엘상에 대하여 공부한다.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원래 한 권이었던 것을 주전 250년경 헬라어로 번역할 때, 양을 감안해서 상하로 나누었다. 이 전통이 기독교에 그대로 들어와서 사무엘서는 상하로 되어 있다.

사무엘서의 주요 인물은 (1) 엘가나와 한나 (2)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 (3) 사무엘 (4) 사울 (5) 요나단 (6) 다윗 등이다. 이중에 특히 중요한 세 사람을 고르라면 물론 사무엘과 사울과 다윗을 골라야 한다.

사무엘 상하가 가지고 있는 의의는 사사기에서 왕정기로 이동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사기에 왕이 없어서 혼란을 겪었다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왕이 없었다는 것과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듯이, 사무엘서에도 왕이 없이도 사무엘의 훌륭한 통치가 있었으며, 사울이 왕이었지만 그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혼란이 가중되었으며, 다윗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백성을 다스릴 때 이스라엘 최고의 번영을 이루는 기틀을 맞이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은 엘가나와 한나, 어린 사무엘, 엘리와 그 아들들에 대한 내용이다.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중요한 부분을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다음은 주요 내용을 장별로 구분한 것이다.

(1) 엘가나와 한나; 1, 2장 (1:1-2:10)
(2) 엘리와 그의 두 아들; 3, 4장 (3:1-4:22)
(3) 법궤의 여행; 5, 6장 (5:1-7:2)
(4) 사무엘의 통치; 7, 8장 (7:3-8:22)
(5) 사울의 즉위; 9, 10, 11, 12장 (9:1-12:25)
(6) 사울의 범죄; 13, 14, 15장 (13:1-15:35)
(7) 기름부음 받은 다윗; 16, 17, 18장 (16:1-18:30)
(8)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함; 19, 20, 21장 (19:1-21:15)
(9) 다윗과 그의 사람들; 22, 23장 (22:1-23:29)
(10) 사울을 두 번이나 살린 다윗; 24, 25, 26장 (24:1-26:25)
(11) 블레셋으로 망명한 다윗; 27, 28, 29장 (27:1-29:11)
(12) 사울의 최후; 30, 31장 (30:1-31:13)

1:1-28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다시 에브라임 사람이 나온다. 사사기에서도 에브라임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었다. 사사기 17장에서 나왔던 미가가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사람이었다. 사사기 19장에 나왔던 레위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던 사람이 에브라임 산지에 살았었다. 에브라임 지파는 남쪽 유다 지파와 함께 가장 주도적인 지파였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이라는 지역은 “숩 족속의 두 언덕”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숩”은 엘가나가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라고 할 때의 숩을 말하는 것이다. “라마”라는 말이 곧 “높은 곳” 혹은 “언덕”이라는 말이다. 이 라마는 엘가나의 고향으로 그의 아들 사무엘이 태어나고 (1:19), 살면서 사역했고 죽어서 묻힌 곳이다 (7:17; 15:34; 16:13; 19:18; 25:1; 28:3).

역대상의 족보에 의하면 사무엘은 레위의 아들 그핫 (고핫)의 후손인 레위인이다 (대상 6:34-38).
이스라엘 --> 레위 --> 그핫 --> 이스할 --> 고라 --> 에비아삽 --> 앗실 --> 다핫 --> 스바냐 --> 아사랴 --> 요엘 --> 엘가나 --> 아마새 --> 마핫 --> 엘가나 --> 숩 --> 도아 --> 엘리엘 --> 여로암 --> 엘가나 --> 사무엘

그핫 가문의 레위인에게는 에브라임 지파, 단 지파, 므낫세 지파의 영토가 할당되었다 (수 21:5, 21). 일반의 레위인은 25세가 되면 여호와의 전에서 제사장들을 돕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사무엘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께 바쳐져서 젖을 뗀 후에 하나님의 전에 와서 살면서 일생동안 선지자와 예언자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러므로 엘가나가 에브라임 사람이라는 말은 에브라임 족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에브라임에 거하는 거주하는 레위인임을 말하는 것이다. 엘가나라는 이름은 오직 레위 족속에게만 사용되어졌던 이름이다. 그 뜻은 “하나님이 산 사람,” 혹은 “하나님이 획득한 사람”이다.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하나는 무자하더라
엘가나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하나는 한나요, 다른 하나는 브닌나였다. 한나라는 이름의 뜻은 “은혜” 혹은 “은혜스러움”이다. 브닌나는 “산호(珊瑚)”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 상급인데” (시 127:3), 브닌나는 그 기업과 상급이 풍성했으나, 한나는 자녀가 한 명도 없었다. 결혼한 여인이 자녀가 없으면 그 고통은 당한 사람밖에는 모를 것이다. 더욱이 일부일처제도가 아닌 상황에서 다른 아내는 자녀가 있는데,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었으므로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 지는 상상이 될 수 있다.

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로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엘가나가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로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를 드렸다는 것은 그가 레위인의 직무를 행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레위인들은 평소에는 자기 조상에게 배당된 도시에서 살면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행함으로 본을 보여야 하는 직무를 맡고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기업이 되는 땅을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이어받아 살고 있었지만, 레위인들은 기업이 되는 땅이 없이 살아야 했다. 그런 점에서 레위인들은 철저하게 자기들의 주변 백성들에게 의존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엘가나의 시대에 하나님의 성막은 실로에 있었다. 실로와 라마다임소빔은 서로 그렇게 멀지 않았다. 그러나 엘가나는 자기에게 정해진 때에 레위인의 직무를 다하기 위하여 일년에 한 차례씩 여호와의 전으로 가서 봉사도 하고, 자기 가족을 위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제사 드리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 예배와도 역시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다.

엘가나는 만군의 여호와를 예배했다. 히브리어로는 “여호와 쩨바오트”는 “예와 엘로헤이 하쩨바오트”의 축약형이다. 즉 만군의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축약형인 것이다. 쩨바오트는 만군, 군대, 혹은 무리라는 의미이다. 즉 모든 천군 천사를 거느린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늘의 군대, 하나님의 군대 등을 의미한다. 모든 영적인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영적인 존재들을 만군이라고 말한 것이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들의 아버지인 대제사장 엘리가 너무 나이 많아 늙었으므로 희생제물을 드리거나 할 수 없었으므로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소개되고 있다. 엘리는 물론 대제사장의 역할도 하고 있었지만, 제사장으로서 순번을 따라 돌지 않았고, 일종의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지도하고 있었다.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엘가나는 자기 제물로 예배를 드린 후에 제사장의 몫을 제외하고 자기의 것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이때 그는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녀에게서 난 아들들과 딸들에게는 모두 한 몫을 주었지만, 한나에게만 두 사람의 몫을 주었다. 왜냐하면 엘가나가 한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엘가나가 한나를 편애한 것으로 이해되기보다는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녀를 배려해준 것이다. 사랑은 배려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한나가 잉태하지 못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녀의 태의 문을 닫으셨기 때문이다. 불임의 원인이 보통은 남자에게도 있고, 여자에게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한나에게 문제가 있었다. 왜냐하면 엘가나는 브닌나와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들을 두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브닌나이다. 여호와께서 한나의 태의 문을 닫으셨는데, 그로 인하여 한나를 심히 격동하게 하고 번민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브닌나는 한나의 대적으로 나와 있다. 가정 안에서 갈등 구조가 발생하여 이제 가족 사이에 대적이 생긴 것이다. 브닌나는 한나를 깔보았다. “아기도 낳지 못하는 주제에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분수를 알아야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올라가서도 남편이 한나를 배려하여 갑절의 몫을 주는 것이 질투가 나서 어찌할 수 없었다. “격동시키다”라는 뜻은 “자극을 주다,” “격동시키다,” “화내지 않고 내심으로 동요시키다”라는 뜻이다. 교묘한 수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 화내게 만들되 자기는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브닌나는 자기에게 자녀가 있으므로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면, 한나를 배려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한나를 배려하는 엘가나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브닌나는 다 차지하고 싶었다. 남편이 한나와 함께 자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남편이 그녀와 잘 때, 비아냥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잠을 자도 잉태치 못하는 여인이므로 남편만 아까웠다. 자기는 아이를 갖고, 아이를 낳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또 아이를 갖고, 또 아이를 낳고, 또 젖을 떼면, 또 아이가 들어섰다. 그런데 한나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런 한나를 사랑하는 엘가나가 야속했고, 한나를 괴롭혀서 그녀의 분이 차서 폭발하도록 만들었다.

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이러한 상황이 한 두 해 동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매년 엘가나가 자기 가족을 이끌고 실로 성소에 올라갈 때마다 이런 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남편이 한나에게 두 몫을 주는 것이 브닌나에게는 계속적으로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브닌나는 다시 한나를 괴롭히고, 격동시켰으며, 그로 인하여 한나는 울기만 하고, 먹을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보다 두 배의 고기를 받았지만 한나는 먹을 수가 없었다. 먹는 것이 하나도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금식은 밥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자연스럽게 시작할 수 있다. 한나는 그녀가 자녀가 없다는 것을 이용하여 브닌나가 그녀를 조직적으로 괴롭히자 먹을 수가 없었다.

엘가나는 한나를 위로한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한나는 브닌나가 그녀를 격동시키고, 조직적으로 그녀를 괴롭혀도 그 사실을 가지고 엘가나에게 불평한 것 같지 않다. 다만 그녀의 고통을 울음과 단식으로 표현한 것뿐이다. 엘가나는 한나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자녀가 없는 것뿐만이 아니라 브닌나가 그녀를 괴롭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다 한들, 그것은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브닌나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화풀이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엘가나는 그가 한나를 사랑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자신이 한나에게 열 아들보다 더 낳은 존재가 아니냐고 하며 한나를 위로한다. 한나에게는 남편의 사랑만으로는 살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남편이 그녀를 더 사랑하면 할수록, 브닌나에게서 오는 고통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9절은 한글 번역이 애매해서 한나가 엘가나의 위로를 받고 먹고 마셨다는 것인지, 아니면 한나를 제외한 사람들만이 먹고 마셨다는 말인지 불확실하다. 원어나 영어도 역시 불확실하다. 식사시간이 끝나고 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말로 이해가 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한나는 엘가나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먹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18절 말씀에 한나가 먹었다는 말이 나오므로 아마 9절에 말하는 것은 한나가 그들이 먹고 마실 때가지 기다렸다가 그들이 다 먹고 마신 후에 자리를 기도하러 가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엘가나와 브닌나와 한나 사이에 발생한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으신 것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나를 훈련시키시고 그로 인하여 한나로 기도하게 하시려고 이렇게 하시는 것이다. 문제의 출제자가 하나님인 것이다. 엘가나의 위로와 사랑이 도움이 마음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그가 한나를 사랑하면 할수록 브닌나의 투기는 더 클 수밖에 없기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한나는 문제의 출제자를 보아야만 했다. 우리도 근본적인 문제의 출제자가 누구인가를 잘 알아야 한다. 사탄이 주는 유혹일 때에는 피하면 그만이다. 대적하여 싸워서 이기면 그만이다.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무시하면 그만인 것이다. 마음을 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출제자가 하나님이실 경우에는 피할 수 없다. 무시해서도 안 된다. 오직 기도와 금식으로 뚫고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매어 달려야 한다.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기도와 금식으로 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훈련의 기회일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을 통과할 때마다, 우리는 성장한다. 한나는 자기에게 처한 이 고통과 이 괴로움의 근본적인 출처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우리게 고통을 주시는가?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도 고통 그 자체를 목적으로 고통을 주시는 일이 없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시련과 고통이 하나님께로부터 와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고통을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연단시키고, 죄와 싸워 이기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시며, 우리 속에 금강석보다도 아름다운 속사람을 빚어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말씀하여 주신다. 유배지로 사람들을 보내신 후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속마음을 털어놓으신다 (렘 29:11-13):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이라
11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2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한나는 불임이라는 유배지로 몰려갔다. 한나는 왜 그녀가 그런 상황에 빠져들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 외에는 나아갈 곳이 없었다. 하나님의 그녀에 대한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그녀의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인 것을 믿었다.

한나는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기도하기 위하여 일어나는데 대제사장 엘리는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그는 여호와 전 설주 옆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이미 너무 나이가 많았고, 4:18에 의하면 그는 비둔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많은데다가 몸이 비대하고 행동이 둔하니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나는 일어서고, 엘리는 앉아 있었다는 것은 꼭 무슨 상징과도 같다. 한 여인은 고통스러워하며, 여호와께 나아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람, 예민하게 하나님의 일을 살피며, 성도들을 살펴야할 목회자는 자기 몸만 살찌우고 행동은 굼뜨고, 영적으로 예민하지 못하여서 앉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 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이번이 한나가 하나님께 매어 달린 첫 번째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만큼 신실하고 간절하게 하나님께 매어 달린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한나는 괴로웠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한나는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통곡을 하며 기도하였다. 그녀의 사정을 알아줄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고, 그녀의 문제를 해결하여 줄 분도 역시 하나님뿐임을 알았다. 그녀는 자기의 기도를 남편이 대신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엘리 제사장이 대신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직 여호와께만 매달리기 원했다. 이것이 믿음이다. 문제의 출제자도 되시고, 해결자도 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것이다. 한나는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서원을 하였다. 서원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서원은 하나의 거래가 아니다. 서원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헌신의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한나가 하나님께 요구한 것은 아들을 주시라는 것이다. “저의 고통을 하나님이 돌아보시고, 저를 생각하시고, 저를 기억하시면 아들을 한 명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녀의 기도는 성경 안에 많은 아름다운 기도들과 함께 하나의 아름다운 기도의 모델이 된다. 한나는 또한 기도함에 있어서 고압적인 태도나 거만한 태도나 심드렁한 태도가 아니라 정말로 낮아진 자세로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하나님이 한나에게 정말로 원하셨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브닌나에게 자녀들을 많이 주신 것처럼 한나에게도 많은 자녀들을 주셨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한나와 브닌나는 누가 더 많은 자녀를 낳는가 경쟁하다가 한 세상을 다 보내고 말았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낳은 사무엘이라는 걸출한 인물은 이스라엘의 역사상에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엘가나와 한나 사이에 사무엘을 주시도, 한나로 하여금 고통을 허락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그녀를 낮아지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간절한 바람으로 나아오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지혜롭다면, 우리는 다른 행동을 중지하고 문제의 출제자 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때 오직 해결자 (해결사가 아니다)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다.

한나는 하나님이 그녀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약하였다. 그의 머리 위로 삭도가 지나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서원을 하였다. 물론 부모가 자녀를 드렸다고 해서 그 자녀가 그 뜻대로 자라주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모두 하나님께 받았으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자세로 길러야 한다.

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13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한나는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였다. 그녀의 심정을 하나님께 털어놓아야 했기에 그냥 그렇게 기도할 수 없었다. 정말 그녀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내어놓아야 했다. 우리는 이 수요 성경공부 시간을 정말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엘리는 한나의 기도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속으로 그녀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런데 엘리는 그녀의 입술만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녀가 취한 여인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여인을 대제사장 엘 리가 술 취한 여인으로, 술 취해서 인사불성인 여인으로, 술 취해서 술주정하는 여인으로 보았다. 나이가 많아서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혹은 쉽게 생길 수 있는 오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너무했다.

14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엘리는 상황을 잘못 파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용감하였다. 그래서 한나에게 꾸중과 책망을 하였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이 말이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면 참으로 좋은 것이겠지만, 문제는 잘못된 상황파악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이렇게 상황을 잘못 파악하고 행동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엘리는 한나를 보고 오해하고 그녀에게 직접 말하였지만, 우리는 적은 내용을 듣고, 혹은 잘못된 정보를 듣고, 상황을 잘 모르면서, 함부로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오해한 엘리에게 한나는 겸손하고 진실된 태도로 응답한다. 자기는 슬픈 여자이며, 자기 마음을 여호와께 통하였다고 하며,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다고 하였다. 막상 서원기도의 내용은 엘리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미 엘리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하나님께 서원한 내용이기에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17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18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愁色)이 없으니라
엘리는 한나가 기도의 제목을 말하지 않는 것이 궁금해서 견디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엘리는 한나를 존중하였다. 그래서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의 인사를 해 준다. 그렇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비록 응답이 인간을 통하여 나온다 할지라도 그 근본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에 만족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고 역사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 기도하였다면, 이제 맡겨야 하는 것이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은 한나가 엘리에게 기도의 응답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보기도와 호의를 요구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중보기도를 할 수 있고, 마음으로 성원할 수도 있다. 마음으로 성원할 수 없으면, 위하여 기도하는 중보기도를 하기가 어렵다. 한나는 엘리의 호의의 가득 찬 중보 기도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우리 교회가 서로 위하여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를 바라자.

한나는 이제 먹을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여호와께 털어놓은 후에 먹을 수 있었다.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한 후에 먹을 수 있었다. 우선순위의 문제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끼니를 건너는 적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만큼 문제 거리도 없는 것이고, 그만큼 성장이 없을 수도 있다. 한나와 브닌나를 비교하여 보라. 브닌나가 뭐 그리 대단하게 기도하였을 것인가? 기도하는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다. 고통의 문제를 안고 기도하는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다. 고통당하고 있는가? 그 고통이 어디에서 왔던 간에 그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리고 해결하심을 받자.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받자. 하나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놓은 후에 하나님 앞에서 평안함을 얻었고, 그리하여 그녀의 얼굴에는 다시 수색 즉, 근심의 빛이 없었다.

19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기도한 그 다음날 엘가나와 한나와 브닌나는 라마로 돌아갔다. 그리고 엘가나가 한나와 동침하였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였다.

20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그리하여 한나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라는 의미이다.

21@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엘가나와 온 집안은 여호와께 매년제과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갔다. 이 말은 아마도 가족과 함께 실로로 올라갔다는 점에서, 레위인으로서의 사역을 하기 위해서 올가간 것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한 가정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올라갔다는 의미이다. 엘가나는 이 예배를 위하여 브닌나와 그 자녀들을 데리고 올라갔다. 그러나 한나는 사무엘을 양육하는 것에 철저하기 위하여 실로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 그녀는 사무엘을 젖을 뗄 때까지 철저하게 양육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나는 그녀의 서원에 충실하기 원하였다.

23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엘가나는 한나의 의견에 철저하게 동조하였다. 왜냐하면 그와 한나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아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젖을 떼기 전까지가 제일 중요하다. 그런데 요즈음은 아예 젖을 먹이지 않으니 어떻게 교육을 할 것인가?

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 쌔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사무엘의 젖을 떼고 여호와께 그를 데리기 위해 실로로 갈 때, 가지고 간 예물도 거하다.

25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26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한나는 그 옛날을 기억하며 간증을 한다.

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서원을 온전히 지키는 한나의 모습이 나온다.

2:1-36
사무엘상 2:1-10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는 시간 관계상 해설을 생략하기로 한다.

11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이제 한나로부터 얻은 아들 사무엘은 하나님께 드린 엘가나는 라마다임소빔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제 막 젖을 뗀 어린 아기에 불과한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하였다. 한나가 철저하게 사무엘을 교육하지 않았다면, 사무엘은 어머니의 사랑과 가정의 따스함의 부족의 결과로 바른 선지자가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의 교육은 사무엘에게 최소한이지만 충분하였고, 그리하여 사무엘은 이제 엘리의 손에 맡겨진 것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얼마나 한나와 엘가나의 가슴이 아팠을까? 아들 하나를 원했고, 그 아들을 서원하여 하나님께 받았고, 그 아들을 또한 서원한대로 하나님께 드린 한나는 이제 그녀의 슬하에 아들이 없다. 하나님이 자녀를 더 주신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아들을 하나님의 전에 드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비록 기쁨에 가득 찬 감사의 노래를 부른 한나이지만, 왜 그녀의 가슴속에 고통이 없었을까? 그녀의 가슴에 고통이 없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그녀를 인간이 아닌 기계로 이해하는 것이고, 마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기 위해서 모리아산을 올라가는 아브라함의 가슴속에 어떠한 연민이나 고통이 없이 오직 기쁨만이 가득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때, 최선의 것으로 최고의 것으로 드리지 않으면, 그것은 마치 적선하듯이 거지에게 동냥을 하듯이 주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릴 때, 최선의 것으로, 최고의 힘을 다해서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물이 되는 것이다. 그 예물에 내가 담겨 있지 않으면, 그것은 온전한 예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나와서 피곤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여러분 모두는 정말로 최고의 것으로, 최선의 것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나 힘이나 예물이 그저 우리의 남는 것을 드리는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우리가 그것을 드림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손해를 볼 수 있는 그것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리는 자녀들이 되자.

12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니라
11절을 다시 보자.
11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어린 아이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지만, 엘리의 친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자들이었다.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였다. 히브리 원어로 볼 때, 12절 상반절은 “엘리의 아들들은 벨리알의 아들들이었다.” 벨리알은 우리가 사사기를 공부할 때 기브아의 폭도들인 기브아의 “비류들”에게 사용되었던 단어와 동일한 단어이다 (삿 19:22; 20:13).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레위인과 그의 첩, 그리고 하인은 늦은 밤에 되어서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려고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초청하여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때 마침 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에브라임 지파 출신 한 노인이 자기 집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함께 먹고 마시는 시간을 갖고 있었다 (삿 19:1-21). 이제 그들이 모든 것을 먹고 마신 후 “마음을 즐겁게” (While they were enjoying themselves) 할 때,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문이 부서져라 두들기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사사기 기자는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긴 사람들을 “기브아의 비류들”이라고 소개한다. 여기 “비류”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벨리알”(Belial)이다. 이 단어는 아마도 부정 접두사 “벨리” 즉 “아무 것도 아님” (nothingness, not, without)과 명사 “알” 즉, “가치,” “이득,” “혜택” 등 (worth, profit, benefit)이 결합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벨리알은 “쓸모없는 것들의 아들들, 아무 가치 없는 인간들” (sons of worthlessness, men without worth/horner)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같은 표현이 구약에는 16회나 나온다 (신 13;13; 삼상 1:16; 삼상 25:25; 왕상 21;13; 잠 16:27 등). 구약에서 이 단어 해당되는 사람들은 살인자들, 강간범들, 거짓 증인들, 타락한 제사장들, 알코올 중독자들, 반역자들, 다른 사람들을 우상숭배로 이끄는 자들, 여호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고후 6:15에 한 번 나오는데, 사탄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엘리의 아들들을 “벨리알의 아들들”이라고 했을 때, 그 뜻은 “아무 쓸모없는 사람들”(Worthless men) 혹은 “좋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good-for-nothing; 쓸모없는 사람, 밥벌레, 건달 등)을 의미한다. 엘리 제사장이 기도하던 한나를 보았을 때, 그는 그녀가 알코올에 중독된 여인으로 보았다. 그래서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한나는 자신이 마음이 슬픈 여자이며, 여호와 앞에 그녀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라고 말하며,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한나가 말한 “악한 여자”가 곧 “벨리알의 딸”이라는 단어이다. 정말 꼭 집어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엘리는 자기의 아들들이 “벨리알의 아들들”이었는데, 한나를 “벨리알의 딸”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벨리알의 아들”을 한글 성경에서는 불량자로 번역하고 있다. 참 재미있고, 적절한 번역이다. 꼭 불량품이 생각난다. 불합격품이 생각난다. 이전에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이들은 스포일(spoil)된 사람들로 설명하셨다. 즉 부패하였다는 것이다. 제사장으로서 불량품이라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이스라엘의 자녀로서 불량품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불량자를 정의할 때,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니라” (로 야데우 에트 예흐와)라고 하였다. 즉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동사 “알다”는 히브리어로 그 유명한 “야다”라는 단어이다. “야다”는 단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적이 앎이다.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머리와 지식으로는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알았을까? 그러나 그들은 가치관과 철학과 사고와 생각과 삶과 태도로 여호와를 알지 않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했으며, 여호와의 말씀과 그분께 드리는 제사와 그분의 백성들을 우롱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안다는 말은 여호와를 경외한다 (respect or honor)는 말과 같으며, 또한 여호와께 순종한다 (obey)는 말고 같은 것이다. 사실 이것이 다이다. 그러나 엘리의 아들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엘리의 아들들이 어떻게 벨리알의 아들들이었으며, 또 어떻게 여호와를 경외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았는지 사무엘상 저자가 제시하여 주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홉니와 비느하스는 백성들에게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생각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인생을 낳고, 인생이 운명을 낳는다”는 식의 말도 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미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제사를 드리는 백성들은 우롱하는 것이 한 두 번의 범법이 아니었다. 이미 습관이 되었던 것이다. 분명히 제사장들도 자기 순번이 있어서 그 순번을 따라가며 그 역할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엘리의 집안은 수 십 년 간 계속적으로 제사장으로서 실로에서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홉니와 비느하스가 어렸을 때부터 그들은 여호와께 사람들이 와서 예물을 드리는 것을 보고, 그 예물의 일부 제사장의 몫으로 엘리가 받으면 그것을 먹고 자라났을 것이다. 굳이 책임을 묻자면, 엘리 제사장은 어떻게 자녀들을 길렀기에 아들들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했다는 말인가? 엘리 제사장은 자녀들을 말씀으로 키우지 않고 단지 제의로서 키웠는가? 아니면 사람이 워낙 물러서 자녀들에게 심한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그냥 곱게 곱게만 키웠는가? 엘리를 보면 정말로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길러야 할까 커다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엘리는 사실 훌륭한 제사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이가 먹으면서 예민함이 떨어지기는 했을지라도, 평생을 하나님을 섬긴 훌륭한 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는 그 아들들을 바로 키우지 못한 죄로 영원토록 불명예스러운 말을 듣게 된 것이다.

번제의 경우는 제물의 태워서 드릴 수 있는 부분은 다 태워서 드리기 때문에 제사장이나 제사를 드린 예배자나 제물에서 먹을 수 있는 부분이 없다. 그러나 다른 제사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소를 한 마리 드린다고 할 때, 하나님께 드리는 부분, 제사장에게 드리는 부분, 그리고 예배자가 그 가족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부분이 다 율법에 정해져 있다. 예를 들어 화목제를 생각해 보자. 레위기에는 여러 가지 제사에 대한 규정이 나와 있다. 3장에 보자. 1절부터 보면 흠없는 수소나 암소를, 먼저 예배자가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문에서 그 예물을 잡는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피를 제단의 사면에 뿌린다. 피를 절대로 먹지 말라는 것을 우리가 알거니와 피에 대한 규정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다. 피는 여호와의 것이고, 피는 어떠한 형태로든 먹거나 마시거나 요리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음에 기름이다. 기름은 여호와께 태워서 드리는 화제의 형태로 드린다. 내장에 덮인 기름,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두 콩팥,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 간에 덮인 기름 등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 살라야 하는 것이다. 그 예물이 양이나, 염소여도 기본적인 것은 비슷하다. 16-1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몫은 결국 피와 기름이다. “제사장은 그것을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식물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의 모든 처소에서 영원한 규례니라” (레 3:16-17).

그러면 제사장은 어느 부분을 먹게 되어 있는가? 즉 예배자는 제사장의 몫으로 어디를 드리는가? 레위기 7장을 보자. 28절부터 34절까지 보면 결국 예물의 가슴과 우편 뒷다리를 제사장에 드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제사장은 예배자가 화목제의 기름과 가슴과 우편 뒷다리를 가지고 오면 기름은 태워서 여호와께 드리고, 가슴과 우편 뒷다리는 여호와께 흔들어서 거제로 드리고 자기들의 양식과 소득으로 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화목제의 기름을 태워 드린 그 제사장이 그 소의 가슴과 우편 뒷다리를 자기의 소득으로 받는 것이다. 34절을 보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취하여 제사장 아론과 그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 (레 7:34). [참고, 신명기 18:3은 “제사장이 백성에게서 받을 응식은 이러하니 곧 그 드리는 제물의 우양을 물론하고 그 앞 넓적다리와 두 볼과 위라 이것을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엘리의 두 아들들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행한 죄악은 너무나 큰 것이다. 이미 예배자들은 피를 제단에 흘리고, 기름을 태우고, 가슴과 우편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기들이 먹을 것을 솥이나 큰솥이나 가마에 삶고 있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제사장들은 사환들을 보내어 그 고기들을 세 살 갈고리로 찍어서 걸리는 대로 강탈해 가는 것이다. 그야말로 제사장의 계급을 이용한 횡포를 부리는 것이다. 종교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러면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기름을 태우는 것은 번제단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과정을 생각해보자. 예배자가 예물을 끌고 오면, 제사장이 안수하고, 회막문에서 잡는다. 잡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죽인다는 것을 포함해서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오물을 버리고, 피를 받고, 기름은 기름대로 걷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홉니와 비느하스가 사환들을 시켜서 고기를 강제로 빼앗을 때, 언제 빼앗았다는 말인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지단다. 첫째, 피를 드리는 것이다. 피는 제단 주변에 뿌린다. 둘째, 기름을 태워 드리는 것이다. 제사장에게 기름을 드리면 제단에서 태워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를 올려 드린다. 셋째, 기름과 함께 제사장의 몫을 드리면 제사장은 자기의 몫을 하나님께 거제로 올려 드리고 자기의 식물로 취하여 먹는다. 그러면 본문에 의하면 짐승을 잡자마자, 기름도 태워 올리기 전에 자기의 몫을, 혹은 자기의 몫보다도 더한 것을 요구했다는 의미이다. 사환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않으시고 날 것을 원하신다”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

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제 16절에 의하면 예배자는 율법을 알기에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제사장에게 드리겠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나님께 먼저 기름을 태워 드린 후에 제사장에게 드리는 몫을 드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환은 “아니라 지금 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고 말한다. 완전히 횡포가 아닌가?

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이 사실에 대하여 사무엘상 저자의 평가는 무엇인가? 먼저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가 여호와 앞에 크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가 큰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먼저 기름을 태워 드려야 하는데,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예배자들에게 무엇을 빼앗아 먹을 것인가에 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불교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예배자들에게로부터 무엇을 빼앗아 먹을 것인가에 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18@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19        그 어미가 매년제를 드리러 그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사무엘상 저자는 곳곳에 적당한 곳에 사무엘에 관한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고 말한다.
지나간 구절까지 소급해서 보면
1) 1:28하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2) 2:11하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3) 2:18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세 구절 다 사무엘이 여호와를 경배하고 여호와를 섬겼다고 나와 있다. 이제 2:18절은 사무엘이 세마포(linen) 에봇을 입었다고 되어 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옷을 의미한다. 제사장은 25세 이상이 되어야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를 할 수 있는데, 레위인의 자녀로서 평생을 여호와께 드림이 된 사무엘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을 입었다는 의미이다. 이미 제사장 엘리를 도와서 제사장의 임무를 배우기도 하고 수행을 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일까?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이고, 사무엘상 저자는 어린 사무엘이 그러한 에봇을 입은 것뿐만 아니라 어머니 한나가 매년 매년제를 드리러 올라올 때마다 어린 사무엘의 키와 몸의 성장에 맞추어서 그에 맞는 겉옷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즉, 한나는 자기 아이가 한 해 동안 이만큼 자랐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겉옷을 지어서 그것을 가지고 올라오는 것이다. 어린 아들을 하나님의 전에 바치고, 그 애틋한 마음을 이렇게 옷을 지어서 가지고 와서 입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나는 얼마나 자기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을까? 이제 사무엘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젖을 뗀 것이 약 3년 쯤 되어서라면, 약 2년이 지났으면, 최소한 만 5세가 되었을 것이다. 엘가나와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의 전에 드린 후에도 아직도 아기가 없었던 것이다.

20        엘리가 엘가나와 그 아내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그 집으로 돌아가매
엘가나와 한나는 그들 사이에 다시 아기가 생기지 아니하여도 그 일로 다시 서원기도를 한다든지, 그 일로 제사장 엘리와 대화를 나눈다든지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대신에 그는 기왕에 주신 사무엘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가 하나님의 전에서 잘 자라는 데에 기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사장 엘리는 보는 눈이 있었다. 비록 엘가나와 한나가 아이를 더 낳을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의 제목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간절히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한문 성어로 말하면 “불감청이나 고소원”(不敢請 固所願: 감히 청할 수는 없으나, 간절히 바라던 바이다)이라고 한다. 엘리의 영적 예민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래서 엘리는 엘가나와 한나 부부에게 먼저 자원하여 축복의 말을 하여준다: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엄밀하게 말하면 엘가나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이 여인 한나로 말미암아 엘가나 당신에게 후사를 주사, 이 여인 한나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서 하나님께 다시 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내가 원합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기왕에 사무엘을 주신 것도 감사하고, 그를 하나님께 드리게 된 것도 감사하지만, 하나님이 다시 태의 문을 여셔서 엘가나와 한나 사이에 사무엘을 대신하여 다른 후사를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사무엘도 물론 후사이지만, 사무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쳤으므로, 가정에서 데리고 기를 수 있는 다른 후사들을 주시기를 원한 것이다. 엘가나와 한나 부부는 금년에는 엘리 제사장에게로부터 이런 축복의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가게 된 것이다.

21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와! 한 때,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 이제 사무엘을 낳아 하나님께 바친 이후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은 것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신 결과이다. 권고하셨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한나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의미이다.

다시 한번 계산을 해보자. 한나가 15세에 결혼을 했다고 하자. 약 5년간 기다리다 20세 쯤 되었을 때에 엘가나가 브닌나를 취하였다. 그리고 브닌나가 약 15년간 자녀를 낳았다고 치자. 그러면 한나는 이미 35세 쯤 된 것이다. 그때 한나는 사무엘을 얻었고, 한나가 약 40 쯤 되었을 때에 다시 다섯 명의 자녀를 얻은 것이다. 아무리 빨리 빨리 자녀를 얻어서 2년에 한 번 씩 아이를 낳았다고 해도 50세 가까이 자녀를 낳은 것이다. 즉 배란이 끝날 때까지 자녀를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초경을 할 때, 시집을 가서 배란이 될 때까지 3년 터울로 아기를 낳으면, 약 16세부터 아기를 낳아서 약 50세까지 낳으면, 약 12명 정도를 낳는 것이다. 내가 자란 마을의 옆집이 바로 이렇게 열 두 명의 자녀를 낳았다. 한나도 아기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 사무엘을 포함하여 4남 2녀를 얻게 된 것이다.

2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불행한 것 중의 하나는 엘리가 매우 늙었다는 것이다. 4:15에 의하면 엘 리가 죽을 때의 나이가 98세였다. 늙을수록 판단력도 좋아야 하고, 영적으로 더욱 깨어서 영성이 날로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인 것이다. 엘리도 늙었고, 엘리의 두 아들들은 더욱 심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만 우롱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심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일, 즉 간음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회막문에 여인들이 살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는 많은 참고 구절이 나오지 않지만 있을 법한 일이다 (출 38:8 참조).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 간음의 죄를 저지른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러나 이 일에 대한 엘리 제사장의 반응은 참으로 무기력한 것이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엘리의 나이를 생각해볼 때, 그는 자기 아들들을 통제하는데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더욱이 그는 그들의 악행, 즉 여호와를 경멸하고,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를 멸시하고, 백성들을 우롱한 죄와,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간음을 한 이 모든 일들이 엘리 제사장 자기 눈앞에서 벌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백성들에게 듣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로 몰라서 그랬는가? 아니면 자기가 알면 눈감아줄 수도 있는데 백성들이 말하니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아마도 전자일 것이다. 그래도 문제는 심각하다. 몰랐어도 문제요, 백성들에게 들어서 알았어도 반응이 문제인 것이다.

엘리 제사장이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사생결단을 각오하고, 자기가 아들들을 죽일 정도로 잡아주지 않으면, 자기 아들들도 하나님께 죽을 것이요, 자기도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분명하게 말해 주었어야 할 텐데, 너무나 약하고 무기력하게 자기 아들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24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엘리는 계속적으로 무기력한 말만 한다. “그리 말라”는 말로서 들을 아들들인가? “소문이 좋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약한 말이다. 그들이 여호와의 백성까지 죄를 짓게 만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중요한 말을 한마디 한다. “너희가 지은 죄들은 인간에게 죄를 지은 것이라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이다. 차라리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이면, 하나님이 판결을 해 주시겠지만, 하나님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할 수 있겠느냐?” 즉, “나도 너희들을 위해서 간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의 말이 이 정도로 끝나서야 되겠는가? 너무나 약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엘리의 나이로 보아서나 영성으로 보아서나 너무나 힘든 상황인 것이다. 엘리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그 아들들에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레위기 10:1-2에 보면, 첫 번째 제사장인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불을 담아 여호와께 분향하였다가 여호와께서 불로 그들을 죽이신 일이 나온다. 엘리 제사장은 누구보다도 그 일을 잘 알았을 것이다. 다른 불을 드렸다고 죽었는데, 자기의 아들들은 백 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의 말은 이렇게 미약했던 것이다.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엘리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간곡한 권고를 듣지 않았다. 너무 늦은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하더라도 깨달으면 돌아설 수 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늙은 아버지의 말은 얼마나 더 우습게 여겼을까? 백성들에게 빼앗아 먹는 고기가 맛이 있고, 자기 부인을 두고 회막문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 간음의 죄를 저지르는 것은 너무나 맛이 있어서 그 죄악의 맛을 이겨낼 힘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사무엘상 저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에” 그들의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라는 말로 들리지 않는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은 어느 경우인가? 경건의 시간을 통해서도, 설교를 통해서도, 성경 공부를 통해서도, 개인적인 성경 공부를 통해서 자기의 죄를 지적하여 주는 주변의 어른들을 통해서도 자기들의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문제를 발견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문제인 줄을 모르고, 돌이킬 줄을 모른다면,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한 때인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엘리의 아들들에게만 이 일이 해당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제사장이나 목회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공연히 겁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아간이 심판을 받듯이,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심판을 받듯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심판을 받듯이 하나님은 분명히 심판하실 대상이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돌이켜 회개할 것을 늘 찾아서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경고하시고 책망하시는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그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미 이런 말씀을 들으면 그것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데, 아무런 음성도 들리지 않으면 정말로 위험한 것이다.

26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엘리의 두 아들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전을 범죄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무엘을 기르신다. 점점 자라는 것이다. 어린아이에서 소년으로 자라는 것이다. 이제 여호와께로 은총을 받을뿐더러 사람들에게도 은총을 받는 것이다. 우리 주님 예수님도 이렇게 자라나셨다. 우리 교회의 신생아부터 어린아이들과 청소년들도 역시 이렇게 자라나기를 기도하자.

27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늙은 엘리 제사장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무엇이 그를 오늘날 이렇게 비참한 상태로 몰고 갔는가? 오늘 우리는 이것에 초점을 맞추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로 하자. 왜냐하면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전 10:11)는 말씀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엘리의 아들들의 죄는 무엇이었는가?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즉 예배를 능욕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충실하게 하나님께 드리지 아니하고, 중간에 가로채고 착복했다. 하나님께 충실하게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몫을 주시는데, 그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아니하였다. 자기들이 받을 것을 다 받고, 어느 예배자에게든 가서 그들이 먹으려고 솥에 삶는 것을 세 살 갈고리 (즉, 三指創)를 가지고 와서, 찔러서 걸리는 대로 뺏어 먹었다. 또 심지어 하나님께 먼저 기름을 태워 드려야 하는 규정을 무시하고 자기들이 구워 먹을 고기를 얻기 위하여 생고기를 먼저 뺏어 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을 사무엘상 저자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을 오늘날로 적용한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하나님께 마땅히 돌아가야 할 영광과 예물과 예배를 예배 인도자가 가로채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하는 일이 아닌가?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아야 할 자리에 피조물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되어서 자기 자신이 마치 하나님인양 하나님의 것으로 영광과 예배를 받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볼 때, 이런 죄들이 단지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 그들이 지은 죄는 회막문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 동침함으로 간음의 죄를 지은 것이다. 백성들에게 성결한 삶의 본을 보여야 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의 제사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회막문의 여인들을 범한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이 계급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질서는 있을지언정, 계급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고, 대장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복종한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을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왕명을 거역하여 새로운 명령을 내리는 것이 바로 반역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과 뜻이고, 그에 순종하는 삶이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을 때에 나는 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순종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고 말한 바울의 본을 늘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엘리의 아들들의 죄에 대한 엘리의 태도는 너무나도 미온적인 것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안타까웠지만, 그 아들들을 엄하게 다스리지 못하는 중대한 죄를 저지른 것이다. 자녀들을 훈련하고 심판하고 징벌하면서 채찍으로 그리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훈련과 심판과 징벌과 채찍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라는 정도의 말로써 어떻게 악행을 하는 자녀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자식을 매로 다스려서라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세우지 않으면, 그 자식의 인생이 망치고, 나의 삶도 망치고, 나의 가정도 망치고, 타인의 삶도 망치고, 사회도 망치고, 하나님도 욕을 먹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가 마땅히 자식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저 자식에게 좋은 것 더 주고,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기죽이지 않고, 오냐, 오냐 기르면 그 자식이 잘 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잠언에 나오는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13:24),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찌니라” (19:18) “아이의 마음에는 미려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22:15)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23:13),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히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29:17)는 말씀들을 기억해야 한다. 한결같이 자식을 물리적으로 징계하는 것을 포함하여, 근실히 징계해야 자식도 진정한 사랑이고, 그 자식도 잘되고, 그 자식에게 소망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와 챨스 웨슬리를 기른 수산나 웨슬리 여사는 열여섯인가 하는 자녀들을 모두 다 훌륭하게 기른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교육 방법은 아이들이 서, 너 살이 되어 자기 고집을 세울 때, 즉 자아가 형성되기 전에 매로 다스려서 그들의 기를 꺾어 놓음으로써 그들을 순종하는 자녀들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현대 교육법은 기를 살리는 교육인 것을 보면 얼마나 성경적 교육이 보수적인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엘리의 가정을 볼 때,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할 부분이 바로 자녀 교육에 관한 부분이 아닌가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엘리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신다. 그래서 한 명의 하나님의 사람, 즉, 선지자를 선택하셔서 엘리에게 보내신다. 아무리 세상이 혼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사람들에게 전하신다. 지금은 성경이 완성되었고, 자유세계에 사는 누구나 성경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접할 수 있기에,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에는 훨씬 더 선지자들을 통하여 시시때때로 말씀하여 주셨던 것이다. 기드온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듯이 (삿 13:6), 엘리 가정을 심판하기 위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택하신 것이다. 이 무명의 선지자는 요나와 같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임을 맡았다. 심판의 메시지는 회개하면 다시 회복될 수 있는 회복의 메시지를 일반적으로 포함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레미야처럼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인기가 없는 일이다. 오히려 시대에 영합하여 청중이 듣기를 원하는 그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줄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훨씬 더 인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이 선지자는 그 시대 그 나라 최고의 지도자였던 엘리에게 담대하게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가?

이 무명의 선지자는 어느 날 엘리에게 찾아와서 “여호와의 말씀에”라고 말을 시작한다. 즉 히브리어로 “네움 예흐와”로 시작되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이 선지자는 레위 지파와 아론 자손의 하나님 앞에 받은 특권과 은혜를 먼저 상기시킨다. 그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의 애굽에서의 구원의 역사는 어린 모세의 강물에서의 구원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모세가 곧 레위에 속한 사람이요, 그의 형 아론이 곧 레위 지파 중에서 제사장의 성직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칠 때, 떨기나무에 임하신 하나님을 뵘으로 민족구원의 소명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아론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도권을 가진 선택이었고, 사랑이었다. 이같이 성경은 항상 하나님의 주도권으로부터 모든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다.

28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나의 제사장을 삼아
                        그로 내 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의 드리는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하나님은 더 명확하게 아론 자손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직분과 특권에 대하여 거론하신다.
        (1) 은혜: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나의 제사장으로 삼아” (I chose your father out of all the tribes of Israel to be my priest,): 엘리의 조사에게 주셨던 첫 번째 특권과 은혜는 그의 가문인 아론 족속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셔서 하나님의 제사장을 삼으신 것이다. 즉 아론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론을 제사장으로 삼으시고, 그의 모든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형인 아론을 택하셔서 그와 그의 아들들이 영원토록 제사장이 되게 하셨던 것이다. 출애굽기 28:1을 보자: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여.” 모세의 지파인 모든 레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택한 것이 아니라 오직 모세의 형인 아론의 가문만이 제사장이 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제사장 가문이 해야 할 일과 그 일에 따른 특권을 다시 요약 반복하여 설명하여 준다. 물론 엘리 제사장이 이 일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에게 확실하게 그의 받은 은혜와 직분과 특권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2) 직분: “내 단에 올라” (to go up to my altar,): 제사장은 하나님의 성막에서 하나님의 제단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았다. 심지어 이 일은 레위인들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을 택하여 하나님의 제단에 올라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일을 맡기셨다. 여호와의 단에 오르는 것이 곧 제사장의 직분이다. 예물을 가지고, 백성의 죄를 가지고, 여호와의 제단에 오르는 것이다.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찌라 내가 그 회막과 그 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여호와니라”

특별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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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파노라마 제 19 강 (3/8/06) 제 4-15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3)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사물엘의 통치와 사울이 왕으로 세움을 입는 내용으로 사무엘상 7, 8, 9, 10장이다. 사무엘상의 첫 몇 장은 이스라엘의 지도력이 엘리 제사장...
    Date2006.03.12 By최정인 Repl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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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파노라마 18 (3/1/06) 제 4-14 과 "사무엘상 (2)"

    성경의 파노라마 제 18 강 (3/1/06) 제 4-14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2)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은 언약궤의 행로이다. 사무엘상 4, 5, 6장에 이르는 이 부분은 쉽게 간과되기 쉬우나 우리에게 중요하고도 많은 영적인 교훈을 전달해 주고 있...
    Date2006.03.02 By최정인 Repl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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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 성경의 파노라마 18 (3/1/06) 제 4-14 과 "사무엘상 (2)"

    http://www.kccbr.com/data/bible_wed/wed_0301.wma >성경의 파노라마 제 18 강 (3/1/06) >제 4-14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2) >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은 언약궤의 행로이다. 사무엘상 4, 5, 6장에 이르는 이 부분은 쉽게 간과되기 쉬우나 ...
    Date2006.03.11 Bywebmaster Repl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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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파노라마 17 (2/22/06) 제 4-13 과 "사무엘상 (1)"

    성경의 파노라마 제 17 강 (2/22/06) 제 4-13 과 구약성경 읽기 실제 (1) - 사무엘상 (1) 오늘부터 우리는 사무엘상에 대하여 공부한다.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원래 한 권이었던 것을 주전 250년경 헬라어로 번역할 때, 양을 감안해서 상...
    Date2006.02.26 By최정인 Repl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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